A Country is not a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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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회사가 아니다

사업하고자 계획하는 대학생들은 대개 경제학을 전공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강의때 들은 것을 현장에서 이용하게 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이 학생들은 근본적인 진실을 이해하고 있다: 경제학 수업들에서 배우는 내용은 사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역 또한 진실이다: 경영을 통해 배우는 것은 경제정책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는 큰 기업이 아니다. 훌륭한 기업가에게 요구되는 사고방식은, 일반적으로, 훌륭한 경제 분석가에게 요구되는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십억불을 벌어들이는 기업가가 6조불의 경제에 대한 조언을 구할 적합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라는 것이다.

왜 이 점을 지적해야할까? 기업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나 대개 매우 훌륭한 시인은 아니지 않는가?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기업가들을 차치하고도, 큰 돈을 번 사람들은 전체 국가를 더 부유하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사실, 이들이 하는 조언들은 대개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조언들이다.

내가 기업가들이 멍청이라거나 경제학자들이 특별히 똑똑하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만약 상위 100명의 기업가들과 상위 100명의 경제학자들을 모아놓은다면, 그들 중 가장 낮은 순위의 기업가들조차 가장 인상적인 경제학자들을 압도할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경제 분석에 필요한 사고방식이 기업을 성공하게끔 하는 사고방식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고나서야, 좋은 경제분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고, 잠재력을 갖고 있는 기업가들이 훌륭한 경제학자가 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기업가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두 가지 예로 시작해보자: 먼저, 수출과 일자리 창출과의 관계가 첫째고, 둘째로 외자유치와 무역 수지와의 관계다. 두 문제 모두 국제무역와 관련된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이기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국제무역이야말로 기업가들이 국가와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기업과 기업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쉽게 실수하는 분야이기때문이다.

수출과 일자리

기업가들은 국제무역과 국내 일자리 창출사이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일관되게 오해한다. 첫째로, 미국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자유무역을 지지하기에, 국제무역이 증진되면 세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데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최근에 합의된(역주: 우루과이 라운드에 따른 WTO체제성립을 뜻하는 듯) GATT체제 같은 자유무역협정들이 전세계 고용을 증진시킨다고 믿는다. 둘째로, 기업가들은 국가들이 이렇게 창출된 일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한다고 믿는다. 이 생각을 따라가면, 미국이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고, 반대로 수입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미국은 자유무역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이 자유무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창출된 일자리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춰야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들이 합리적으로 보이는가? 물론 그래보인다. 이 미사여구들은 지난 미 대선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 대선에도 들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이 전세계적으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든가 (또는 자유무역의 이익이 일자리창출의 관점에서 나온다거나), 매우 성공적인 수출국가들이 무역적자에 놓인 국가들보다 낮은 실업률을 달성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다.

왜 경제학자들은 기업가들이 보기에는 상식적인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는가? 자유무역이 국제적으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은 명백해보인다: 무역이 증진된다는 것은 더 많은 수출이, 따라서 더 많은 수출과 관련된 일자리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한 국가의 수출은 다른 국가의 수입이기때문에, 수출로 번 돈은, 단순한 산술적 필요에 의해, 어떤 국가가 국내의 재화를 사는 대신에 수입에 돈을 쓴 양과 일치해야한다. 자유무역이 전세계 지출을 늘릴 것이라는 어떤 이유를 들지 않는 이상 – 그런 조건은 항상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 전세계 수요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위와 같이 산술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진실 너머에 보다 근본적인 질문, 전체적인 일자리를 제한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혹시 재화에 대해 불충분한 수요의 문제가 아닐까? 아주 단기적인 효과를 제외하곤, 분명히 아니다. 사실, 이렇게 수요를 증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연방 준비은행(역주: 미국의 중앙은행)은 원하는만큼 돈을 찍어낼 수 있기때문에, 준비은행이 원할 때 경기 부양을 시킬 능력이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 그렇다면 왜 준비은행은 항상 경제를 호황상태로 유지시키지 않을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 즉 너무 많은 일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면 —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들을 초래하고, 나아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여러가지 정당한 이유로 믿고 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에서 일자리수를 제한하는 것은 미국 경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수요 – 그것이 수출로든 또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 가 제한되기 때문이 아니라, 연방준비은행이 생각하기에 인플레이션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미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실업률이다.

이 점은 단지 가설이 아니다. 1994년동안, 연방준비은행은 7차례에 걸쳐서 이자율을 높였다. 그 공공연한 이유가 바로 경기 호황이 너무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경기를 과열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 걱정했기때문에 경기를 냉각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점이 무역이 고용상황에 미치는 영향에 의미하는 바를 고려해보자. 미국 경제가 큰 수출 증가를 경험한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이 2000억불어치의 미국 상품을 산다는 조건으로 노예노동에 대한 반대를 거둬들인다고 해보자. 연방준비은행은 어떻게 할까? 연방준비은행은 수출로 인한 경기팽창효과를 이자율을 올림으로써 제어하려고 들 것이다; 즉 수출과 관련된 일자리 증가는 크든 작든 이자율에 민감한 경제분야, 이를테면 건설업같은 분야의 고용 감소와 일치할 것이다. 반대로, 수입이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준비은행은 이자율을 삭감하는 것으로 대응할텐데, 그럼으로써 수입품과 경쟁해서 잃는 일자리는 대충 다른 경제분야의 일자리 증가와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유무역이 전세계 수출액을 증가시키는 딱 그만큼 항상 수입액도 늘릴 것이라는 점을 무시하더라도, 자유무역이 미국 고용을 증진시킨다거나, 다른 제반 무역 정책, 이를테면 수출 진흥이 우리 경제의 총고용을 늘릴 것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미 상무부 장관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미국 회사들을 위해 수십억불어치의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해도, 그가 수출관련 일자리를 늘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설사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대강 비슷한 수의 다른 경제부문의 일자리를 줄이는데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즉, 미국 경제가 수출을 증가시키거나 수입을 감소시키는 것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식의 논리는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할 때 별로 효과가 없다. (내가 참석했던 기업 논의장에서 NAFTA가 미국 총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나와 함께 있던, NAFTA를 지지하는 논의자는 “이런 식의 말을 하니 왜 사람들이 경제학자들을 미워하는지 알만하군요!”라고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늘어난 수출 또는 줄어든 수입으로 얻은 일자리 증가는 눈에 보이는데 비해서 – 외국인들이 살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수입상품과 경쟁때문에 폐업한 공장들의 노동자를 떠올려봐라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다른 효과들을 추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방 준비은행이 전체 미국 경제의 총고용에 대한 목표치와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수출입의 변화가 총고용에는 별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투자와 무역수지

두번째 예, 해외투자와 무역수지는 기업가들에게 똑같이 어려운 문제다. 수백 개의 다국적 기업들이 한 국가가 제조업 공장을 세우기에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연간 수십억불에 달하는 돈을 투자해서 공장을 짓기로 했다고 해보자. 이 국가의 무역수지는 어떻게 될까? 기업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 국가가 무역흑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이 국가가 큰 무역수지 적자를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경제학자들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업가들의 답변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추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영하는 회사를 생각하며, 사업들의 생산능력이 갑자기 확대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묻는다. 당연히 이 회사들은 덜 수입(지출)하고 더 많이 수출(생산)할 것이다. 같은 식의 일이 여러 산업부문에서 일어난다면, 경제 전체적으로 무역 흑자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경제학자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왜냐? 왜냐하면 무역수지라는 것이 전체 국제수지의 일부이고, 한 국가의 전체 국제수지 – 외국에 판매한 총액과 외국으로부터 사온 총액의 차이 – 가 항상 0이어야하기 때문이다[1] 물론, 국가가 무역수지 적자나 흑자를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한 국가가 상품을 판 액수보다 더 많은 상품을 사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인한 불균형은 항상 자본계정에 대응하는 불균형으로 맞춰야한다. 무역수지 적자에 놓인 국가는 자신이 외국에서 취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팔고 있어야한다;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국가는 해외에서 순채권국이어야한다.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차를 구입한다면, 미국은 그 반대로 무언가를 팔아야한다; 그것이 보잉사 제트기일 수도 있지만, 또한 록펠러 센터일 수도 있고, 사실은, 재무성 채권을 판다. 이건 단순히 경제학자들이 갖고 있는 의견이 아니다; 이건 회계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결론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큰 외자유치가 이뤄진 국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본이 유입되므로, 외국인들은 그 국가 주민들이 해외에서 취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바로 단지 회계상의 이유로, 그 국가의 수입액이 동시에 수출액보다 많아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큰 외자유입이 이뤄지는 나라는 반드시 무역수지 적자가 일어나야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회계일뿐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회사들이 공장을 지으면, 이들은 일부 수입제품들을 구입할 것이다. 투자 유입은 국내 호황을 야기할 수 있고, 이는 수입수요를 늘릴 수도 있다. 만약 그 국가가 변동환율제하에 있다면, 외자유입은 환율하락을 불러올 것이다; 만약 고정환율제라면, 그 결과는 물가상승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시나리오라도 그 효과는 수출시장에서 그 상품가격을 높이고 수입액을 증가시킬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역수지에 대한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본유입은 무역수지 적자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자. 1980년대에, 아무도 멕시코에 투자하는 이들이 없었고, 멕시코는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89년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멕시코의 미래 전망을 높게 사고 큰 투자를 했다. 투자한 그 돈 중 일부는 멕시코에 세워진 새 공장을 위한 기자재를 수입하는데 쓰였다. 나머지는 국내 호황을 야기해 수입액을 증가시켰고 또한 페소화가 절상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수출이 억제되고 많은 멕시코인들로 하여금 수입품을 사도록 부추켰다. 그 결과, 엄청난 외자유입은 거의 비슷한 엄청난 무역수지 적자를 낳은 것이다.

바로 그 이후 1994년 12월 페소화 위기가 왔다. 다시 한 번, 외국인 투자자들은 멕시코로부터 탈출했고, 이제 이야기는 정반대가 되었다. 불황은 수입감소로 이어졌고, 평가절하된 페소 또한 수입액 감소를 불러왔다. 한 편, 멕시코 수출은 증가해 약한 경제를 도왔다. 그 어떤 경제학자도 예상했겠듯이, 멕시코에 투자하는 외국인 투자 규모붕괴와 거의 비슷한 규모의, 멕시코 무역 수지 흑자가 이어졌다.

수출증진이 고용증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는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한다는 말도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있는 말이 아니다. 외국인 투자가 무역수지 악화로 이어지는 각 가능성들은 이들에게는 의문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진짜 투자자들이 받은 돈으로 그만큼 수입기자재들을 살까? 어떻게 환율이 절상될지 알며,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출액이 감소하고 수입액이 증가하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일인가? 기업가들의 의심의 근저에는, 자본유입은 반드시 — 그럴지도 모른다가 아니다 — 무역수지 적자를 수반해야한다는 회계 원리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위 예들에서 모두, 경제학자들이 옳고 기업가들이 틀리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왜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설득력있는 논리들이 기업가들에게는 매우 일어나기 힘들거나 심지어 반직관적으로 보이는걸까?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답을 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답하자면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기반하고 있는 원리들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아도 기업가들이 기업 경영을 할 수 있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깊이있는 답은 개별 사업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되먹임들이 경제 전체적으로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되먹임보다 정도도 약하고 또 종류도 다르다는 것이다. 두 가지 답들을 차례로 분석해보자.

마비된 지네의 비유

때때로, 아주 성공한 기업가가 그가 배운 바에 대해 책을 쓴다. 그 중 일부는 회고록이다: 제 자신이 겪은 것들을 통해 자신의 직업 성공 이야기를 하는 책들. 하지만 더 나아가 이 대단한 사람의 성공의 원리를 일반화하려는 대담한 시도들도 있다.

거의 예외없이, 첫번째 종류의 책이 두번째보다, 책 판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라는 관점에서도 더 성공적이다. 왜냐? 왜냐하면 기업 지도자는 기업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개발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공한, 특정한 상품전략이나 조직혁신을 찾아냄으로써 성공하기때문이다. 일부 큰 업적을 이룬 기업가들이 자신들이 아는 것들을 원리로 정리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지만, 이런 시도들은 거의 항상 실망스러웠다. 조지 소로스의 책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또다른 조지 소로스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워린 버핏은, 실제에 있어서는, 이른바 워린 버핏 투자법으로 투자하지 않는다. 사실, 성공적인 금융가는 금융시장의 일반 원리를 알아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정한, 매우 개별적인 기회들을 포착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다.

나아가 현실에선 성공적인 사업가들이 종종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공식화하고 몇 가지 원리들로 정리하면서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성공적인 경영방식, 그 틀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기실 이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틀에 박히지 않은) 육감과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였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된 우화와 같다. 지네에게 어떻게 그 100개에 달하는 다리들의 움직임을 다 통제하냐는 질문을 하자, 지네가 이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다시는 제대로 다리들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얘기 말이다.

허나 사람들 중에는, 기업가들이 일반 이론들을 정립하거나 그가 하는 일들을 설명하는데 능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이 갖고 있는 능력 – 기회를 포착하고 사업이 직면한 도전들을 해결하는 능력은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미국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잘 정리된 논설이 아니라 바로 다음 뭘 해야할지에 대한 건전한 조언이 아닌가? 그 사업에 있어 일관되게 좋은 판단을 내린 사람이 대통령에게 국가 경영에 대해 좋은 조언을 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있다. 짧게 말하면, 국가는 큰 기업이 아니기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제일 큰 대기업과 국가경제 사이에 놓인 복잡성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경제는 1억 2천만명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에서 제일 큰 고용기업, 제너럴 모터스(GM)의 200배에 달하는 규모다. 허나 이 200 대 1이라는 비율도 제일 큰 대기업과 국가 경제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모자라다. 수학자라면 큰 집단에서 가능한 수의 상호작용은 그 집단의 구성원의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할 것이다.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갈 필요는 없지만, 미국 경제가 제일 큰 기업보다 어떤 의미에서 수백배가 아니라 수만배 더 복잡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심지어 초거대기업들도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특정 경쟁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정한 기술이라든지, 특정 종류의 시장에 대한 특정한 접근법이라든지가 그런 예다. 이 때문에 거대기업들이 거느리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도 어떤 특정한 주제가 관통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 경제는, 거대기업집단에서 보자면 궁극의 악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만 가지 완벽히 다른 사업, 분야들이 단지 국경선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묶여있기때문이다. 밀농사를 짓는 농부의 성공기가 컴퓨터산업에 적용되는데 도움이 될리 만무할뿐더러, 또 이 컴퓨터산업의 성공적인 전략은 아마도 요식업에 적용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한 경제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단 말인가? 답은, 국가경제는 특정한 전략들이 아니라, 일반 원리들에 기초해서 운영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제문제를 살펴보자. 제대로된 정부라면 특정 개인들이나 기업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매기거나 면세혜택을 주지 않는다. 대신에, 좋은 세제는 수년간에 걸쳐 재정 전문가가 개발한 일반적인 원리를 따라 수립된다 – 예를 들어, 대체 투자들 사이에 중립성(neutrality between alternative investment)라든지, 낮은 한계세율, 현재 소비와 미래 소비 사이에 최소한의 차별 등을 들 수 있다.

이게 왜 기업가들에게 문제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보자면 제대로된 기업경영에도 많은 일반원리들이 있지 않던가: 일관된 회계기준, 명확한 책임소재, 등등 말이다. 허나 많은 기업가들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대적으로 방임적인, 현명한 경제 정책가의 역할을 맡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기업 경영가는 혁신적이어야한다. 기업가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에게 있어 국가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데 이런 혁신성이 얼마나 더 어렵고 — 또 불필요한지 —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특정 산업을 진흥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제대로 된 기업수장이라면 회사의 미래에 꼭 필요한 사업분야를 찾는데 열심일 것이다; 기업수장이 투자결정을 개별 이익을 내는 사업부문의 관리자들에게 맡겨버린다면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특정 산업목록을 정해 적극적으로 진흥해야할까? 경제학자들이 산업정책에 대한 이론적 비판들을 차치하고라도, 정부들이 중요산업을 결정하는데 얼마나 무능했는지 과거 역사가 증명해준다. 여러 시기에, 정부들은 철강, 원자력, 합성연료, 반도체 기억소자, 그리고 5세대 컴퓨터산업이 (역자주: 미국의) 미래의 유망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물론, 기업들도 실수를 하지만, 평균적인 정부만큼 맞추는 확률이 낮진 않다. 훌륭한 기업가들은 자신이 속한 산업에 대해 잘 알고, 감각을 갖고 있기때문이다. 허나 이런 지식과 감각은 국가경제만큼 복잡한 체계에서는 그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더라도 갖기 힘든 능력이다. 정부가 특정 산업의 기업가만큼 선구안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여전히, 가장 좋은 경제 관리란 거의 항상 좋은 틀을 수립하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는 생각은 기업가들에게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은 본능은 로스 페로(역주: 미국의 유명한 기업가)가 잘 정리한 바가 있다: “보닛(hood)를 열고 엔진을 고쳐야하지 않겠는가?”

학교로 돌아가기

과학계에서, “석학병”이라는 신드롬은 유명한 연구자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테면 화학자가 의학 전문가 행세를 한다거나 물리학자가 인지과학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똑같은 신드롬은 경제자문가로 발탁된 몇몇 기업가들에게도 명백하다: 이들은, 새 분야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려면 학교에 돌아가야한다, 즉 다시 공부해야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경제가 운영되어야할 일반원리들은 사업에 적용되는 원리들과 다르다. 더 이해하는 게 어렵다는 게 아니라, 다르다. 기업회계에 능숙한 기업가는 자동적으로 국가 수입계정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아는 게 아니다. 국가 수입계정은 기업과는 다른 것을 측정하고 다른 개념을 쓴다. 인력관리와 노동법은 같은 것이 아니다; 기업 재무 관리와 통화정책도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다. 기업가가 국가경제관리자 또는 전문가가 되고자 한다면 새로운 용어들과 개념들을 익혀야하고, 그들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수학적이다.

이 점은, 기업가들, 특별히 매우 성공적이었던 사업가들이 받아들이 어려운 점이다. 복잡다단한 한 산업에 정통하고, 이 산업에서 수십억불 규모의 기업을 운영했던 사람을 상상해보라. 경제정책에 대해 자문을 부탁받을 법한 이런 사람이 1학년 경제학 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복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아니면 경제학자들이 쓰는 생소한 단어들과 개념들이 단지 젠체 하려는 학술용어며 기업 경영 경험만으로도 경제자문을 하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겠는가?

당연히, 내가 앞에 제시한 예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은 후자가 더 그럴 법한 반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경제분석이 기업경영과 다른 개념들,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한단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효과적인 기업경영에 요구되는 사고방식과 경제분석를 가르는 더 깊은 차이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사업전략 과 경제분석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가장 큰 사업이라할지라도 그 환경이 개방형 시스템이라면, 점점 커지는 세계무역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큰 틀에서 폐쇄형 시스템이기때문이다. 기업가들은 경제학자들보다 폐쇄형 시스템에 대해 사고하는 데 익숙하지가 않다.

여기 폐쇄형 시스템과 개방형 시스템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 경제 바깥 예들을 제시하고자한다. 이를테면 고형폐기물을 들어보자. 매년, 평균적인 미국인은 약 500kg에 달하는, 재활용하거나 태워없앨 수 없는 쓰레기를 만든다. 그 쓰레기는 어디로 가나? 많은 지자체의 경우, 딴데로 실어보낸다. 내가 사는 동네의 경우 모든 주민들은 사립 폐기물처리 서비스를 이용해야하며, 지자체 자체 매립지는 없다. 따라서 이 폐기물 처리업체는 우리가 내는 수수료 중 일부를 매립지를 보유한 다른 지자체에 내고 우리가 쓰레기를 그 매립지에 버릴 수 있는 권리를 사야한다. 그 뜻은 내가 사는 동네 주민은 매립지가 구비된 다른 동네보다 쓰레기 처리 수수료가 높을 것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지자체 정부가 선택한 것이다: 그 권역에 보기 불쾌한 매립지를 갖는 대신에 돈을 더 내겠다는 결정 말이다.

개별 마을에 있어서, 그건 선택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미국의 모든 시와 군이 같은 선택을 한다면? 우리가 이 쓰레기를 어딘가 딴 데로 보내버리기로 결정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쓰레기를 제3세계로 수출하지 않는 이상). 미국 전체로 보자면, 문자 그대로 “들어간 쓰레기만큼 나온다”라는 원칙은 성립한다. 국가 전체로 보자면 폐기물을 어디에 묻을지 결정할 수 있지만, 폐기물을 묻을지 말지를 결정할 순 없다. 즉, 폐기물처리 입장에서 보자면, 각 마을들은 개방형 시스템일지 몰라도 미국 전체로는 폐쇄형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든 예는 상당히 명백한 예다. 여기에 또 다른, 아마 덜 명백한 예를 들어보자. 일전에 나는 “주차 후 대중교통 이용(park-and-ride)” 출퇴근객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큰 주차장까지 운전해서 간 다음, 거기서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내 중심으로 출근했다. 불행히도, 이 주차장은 충분히 크지 않았다. 항상 꽉 차버려서 늦게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일터까지 운전하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내가 약 8시 15분 전에만 도착한다면 항상 주차 공간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냈다.

이 경우, 출퇴근하는 각각의 개인은 개방형 시스템에 놓여있다: 그는 일찍 출근함으로써 주차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허나, 출퇴근자 집단 전부를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주차공간을 얻기 위해 일찍 주차장에 온다면, 주차장은 더 빨리 찰 뿐이다! 집단으로서 출퇴근자들은, 적어도 주차문제에 한해서는 폐쇄형 시스템에 놓인 것이다.

이런 예들이 사업과 경제학 사이의 차이와 어떻게 연관된단 말인가? 사업은 — 심지어 매우 큰 기업들일지라도 — 일반적으로 개방형 시스템에 놓여있다. 이들은, 예를 들어 그들의 모든 사업부문에서 동시에 고용을 늘릴 수 있고; 투자를 동시에 늘릴 수 있으며, 모든 시장에서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물론, 기업집단의 경계조정이 완전히 개방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알맞은 노동자들을 수월하게 끌어들이거나 충분한 자본을 끌어모을 수 없어서 기업확장에 애로사항을 겪을 수 있다. 기업수축은 이보다도 더 어려울 수 있다. 능력있는 고용인들을 해고하는 것은 망설일 것이기때문이다. 허나 몇 년에 걸쳐 시장점유율이 두 배가 되거나 반쪽이 나는 기업에 우리는 아무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국가경제 — 특히 미국과 같이 엄청나게 큰 경제 — 는 폐쇄형 시스템이다. 미국 기업 전부가 향후 10년 안에 시장점유율을 두 배로 끌어올 수 있을까?[2] 아무리 그 기업경영이 향상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그럴 수는 없다. 한 이유로, 세계 무역이 증가 일로에 있지만, 70% 이상의 미국 고용 부가가치는 판매업처럼 수출 또는 수입 경쟁과 관계가 없는 부문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산업들과 같은 경우, 미국회사 하나가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려면 다른 기업의 점유율을 끌어내려야한다.

세계 무역에 뛰어든 산업들의 경우, 미국 회사들 집단 전체로 보면 그 시장 점유율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이는 수출액을 증가시키거나 수입을 감소시킴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즉 시장 점유율의 증가는 무역 흑자를 가져올 것이고,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국가는 자본유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조금 계산해보면, 만약 평균적인 미국 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점유율을 5% 정도 끌어올린다면, 현재 순 자본수입국인 미국은 우리가 지금껏 보지 못한 규모의 자본수출국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게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면, 또한 미국 회사들이 아무리 경영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시장에서 총 점유율을 1-2%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기업가들이 경제분석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이들이 개방형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때문이다. 앞에서 든 두 가지 예로 돌아간다면, 기업가는 수출로 인해서 직접적으로 만들어진 일자리들을 보고 이야기에서 이 일자리증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더 높은 고용율이 더 높은 이자율을 부를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고려사항으로 보일 것이다. 허나 경제학자들이 보기에는 고용이 폐쇄형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수출증가로 얻은 일자리들은, 마치 주차장에 일찍 도착해서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park-and-ride 출퇴근객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아서 얻은 것들이다.

무역수지에 외국 투자가 미치는 효과는 또 어떠한가? 기업가들은 외국투자에 의해 특정 산업부문에 미칠 직접적인 효과에 관심을 기울이지, 환율, 가격 등등에 대한 효과는 믿음직스럽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경제학자들은 허나 국제수지가 폐쇄형 시스템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 자본유입은 항상 무역적자와 일치해서, 자본유입은 무역적자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경영과 경제학에 있어서 되먹임(피드백)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왜 훌륭한 기업경영자가 경제학과 관련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왜 특정한 경제학적 아이디어가 다른 생각에 비해 인기가 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 기업과 같이 개방형 시스템에 놓인 행위자는 경제와 같이 폐쇄형 시스템과 다른 피드백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래와 같은 가상적이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한 회사가 두 주요사업부문이 있다고 해보자: widget과 gizmo. 이 회사가 widget판매에서 예상치 못한 선전을 기록했다고 하자. 회사 전체에 미치는 판매증진 효과는 무엇인가? widget판매 향상이 gizmo사업에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많은 경우 답은 어떤 쪽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widget부문은 단순히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고, 회사 전체로는 더 많은 자본을 확충할 것이고, 그게 전부일 것이다.

물론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widget판매 증진은 gizmo사업에 몇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쪽으로, 수익성 있는 widget사업은 gizmo사업 확장에 필요한 현금흐름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부품사업에서 성공경험이 gizmo사업에도 적용될 수 있고, 또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R&D에 의해 두 부문이 다 혜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빠른 기업확장은 기업 내 자원 활용에 무리를 가져와 어느 정도 gizmo 사업부문의 희생의 대가로 widget사업부문으로 자원배분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허나 이런, 기업 내 한 부문의 성장이 간접적으로 다른 부문에 미치는 영향은 원리상으로도 불분명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판단하기도 어렵다; 다른 사업들간 피드백은 그것이 시너지든 자원배분을 둘러싼 경쟁이든, 대개 불분명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주요 수출부문이 급속히 성장하는 국가경제를 고려해보자. 만약 이 부문이 고용을 늘린다면, 이는 다른 산업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기 십상이다. 만약 이 나라가 자본유입을 줄이지 않는다면, 한 부문에서 일어난 수출증가는 다른 수출의 감소나, 또는 수입증가로 맞아떨어져야하는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회계상 수지균형을 이뤄야하기때문이다. 즉, 수출신장때문에 다른 산업부문의 고용과 수출에 매우 강한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이 일어나야한다. 사실, 이러한 음의 되먹임의 강도는 대략 총고용이나 무역수지향상 효과를 거의 지워버릴 수준이다. 왜? 고용과 수지는 폐쇄된 시스템을 이루기때문이다.

개방형 시스템인 산업계에서는, 되먹임은 항상 약하거나 거의 항상 불확실하다. 폐쇄형 시스템인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되먹임은 매우 강하고 매우 확실하다. 하지만 이게 차이의 전부는 아니다. 산업계에서 되먹임은 대개 양의 방향(positive)이다; 경제 정책의 세계에서 되먹임은 대개, 항상은 아니지만, 음의 방향(negative)으로 작용한다.

다시 한 번, 기업이 사업을 확장할 때 일어나는 결과와 국가경제의 그것과 비교해보자. 기업의 재무, 기술 또는 영업능력을 증진시키는 한 사업부문의 성공은 다른 사업부문 확장에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기업의 한 사업부문이 잘 나가면 다른 부문에서도 더 많은 인원을 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재화를 생산하고 파는 국가경제의 경우, 경제 분야 사이에 음의 되먹임이 일어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 산업부문의 확장하면, 이는 다른 산업부문으로부터 자본과 노동력과 같은 자원을 뺏어간다.

사실, 경제학에서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는 예들이 있긴하다. 이런 예는 특정한 산업 내에서, 또는 연관된 산업들 — 특히 이 산업들이 지리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면 — 사이에서 대개 분명히 나타난다. 예를 들어, 런던이 금융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나, 헐리웃이 연예중심지가 된 것은 양의 되먹임이 일어난 분명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예들은 대개 특정한 지역이나 산업들에 국한되어 있고, 국가 규모 수준의 경제에서는, 음의 되먹임이 일반적으로 더 강하다. 이런 식으로, 만약 특정한 산업 복합체만 놓고 본다면,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경제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국부적인 양의 되먹임에 의한 효과는 다른 곳의 음의 되먹임들에 의한 효과를 넘어설 수 없다. 한 산업 또는 산업복합체로 끌어들인 추가 자원은 다른 곳, 즉 다른 산업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은 강한 음의 되먹임이 작용하는 체계에 대한 개념에 익숙하지도 않고, 편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특히, 개개의 기업 관점에서는 그 효과가 미미하거나 불확실한 효과들 — 평균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든다든지 환율에 의해 외자가 증가한다든지 — 이 국가 경제 전체에 정책들을 적용할 때 누적되어 매우 중요한 효과들이 된다는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통령은 뭘 해야하는가?

기업의 성공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필연적으로 — 그리고 옳은 일이기도 하다 — 재계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문제들, 특별히 돈과 얽힌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전부는 조언을 구하는 쪽과 조언하는 쪽 모두가, 사업성공 경험이 경제정책을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에 대해 적절한 인식을 갖고 있으라는 것이다.

1930년, 전세계가 불황에 빠졌을 때, 은행가들은 금본위제를 지키는 정책조언을 했고 산업가들은 생산량 제한을 통해 가격을 올리는 정책을 지지했다. 이 때 John Maynard Keynes는 이런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경제학적 분석에 따라 대규모 통화팽창을 통한 위기극복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 경제학은 기술적이고 어려운 학문이기때문입니다.”[2]

케인즈는 옳았다: 경제학은 어렵고 기술적인 학문이다. 좋은 경제학자가 되는 것은 좋은 기업가가 되는 것만큼 어렵다. (사실, 조금 더 쉬울 수는 있다. 경쟁이 기업가들의 만큼 치열하지는 않기때문에) 그러나, 경제학과 경영은 같은 주제가 아니고, 둘 중 하나에 통달했다고 다른 하나의 통달은커녕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인 기업가가 경제 전문가가 되는 것은 그가 군사전략가가 되는 것만큼 어렵다.

다음에 재계 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그들의 시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한 번 물어봐라. 이들이 이 주제에 대해 공부했을까? 전문가들이 쓴 얘기들을 읽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기업경영에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아마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말들이 의미를 그들도 모를테니까.

[1]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기술적인 예외가 있다. 하나는 “unrequited transfer”라고 불리는 것, 선물, 원조, 등등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투자로 인한 이윤이나 이자지급이다. 두 가지 모두 말하고자 하는 요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 엄밀하게 말해서,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회사만으로 한정해야할 것이다. 미국 소재 기업이 외국 자회사들을 사들여서 세계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3] “1930년의 대공황”, Essays in Persuasion (New York: Norton, 1963)으로부터

0.

어쩔 수 없이 거의 매일 약 3-4시간 스크린이나 지면에 묶여있어야할 상황인데, 생산적인 일이 도저히 안 될 때 글을 읽곤한다. 최근에 그가 블로그에 언급한 13년 전 글을 접하고, 꽤 재밌는 내용인데 좀 찾아봐도 전문을 번역한 건 못 찾았다. (아마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번역해봤다.

1996년에 HBR에 쓴 크루그먼의 글이다. 제목으로 검색하면 바로 PDF를 구할 수 있으니 따로 링크를 걸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공부하는 분야가 아니므로 오역이 있을 것이고, 별로 매끄럽게 다듬을 시간도 없었으니, 좀 흥미가 생기신 분은 영문본(또는 어딘가 있을 국문본)을 보세요.

이 글을 보고, 모선배님의 다른 거시경제학자에 대한 평, “[…] Macroeconomist들에게서 종종 느껴지는 과도한 거만함이 예외없이 느껴져서…”라는 말을 곱씹는다. (그 거시경제학자의 글들도 종종 목격하지만, 느낌은 많이 다르기에)

아울러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쉘든을 좋아했다는 (참고로 난 이 씨리즈 좀 싫어한다) 얘기가 떠올랐다. 또 요즘 블로그에서 거의 주문처럼 외는 “liquidity trap”때문에 중앙은행의 능력이 역부족이라는 주장과 13년 전 미 중앙은행에 대한 평가가 오버랩됐고, 자본통제와 함께 중상주의적인 정책을 펼친다고 중국을 비난하는 글들이 떠올랐고 (중국만 그럴까?), 그의 경제지리학책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흠… 아마 이 번역한 이유도 무엇보다 그 이유일 것이다. 물론 경제자문의 문제가 아니지만.

p.s. : 전에 번역한 내용도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번역을 올리는 게 가능한 글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잘 살피시기를. (퍼가시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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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dow Scholar

http://chronicle.com/article/article-content/125329/

“From my experience, three demographic groups seek out my services: the English-as-second-language student; the hopelessly deficient student; and the lazy rich kid.”

이 곳에 와서, 아주 조금, 아주 뒤늦게 깨달은 것들은, 내가 한국대학에 입학하고서도 한참 뒤에서야 조금 느낀 것들이다. 차마 깨달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다만 남들보다 좀더 수월했기때문에, 그런 딜레마들에 덜 걸렸을 뿐이다. 고개를 조금 숙일 줄 알게 될 때 즈음 되니 졸업할 때가 되어버렸다.

지금 타자를 치고 있으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다. 기억은 꼬리, 꼬리를 물고, …

실험이나 해야겠다. 어쩌면 진짜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공부를 시작해서, 무저갱에서 조금은 구원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과연 제대로 된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몹시 두려울 뿐이다. 그렇더라도 탐할 것 하나 없다는 것, 또 새기고 새겨야겠다.

허나 이러고 있을 시간에야말로, 적어도 가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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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imothy 6:3-10

0.5

옛날에 피츠버그를 들려 선배님을 뵙고 도심 야경을 보기 위해 언덕에 올라갔다. 야경은 장관이었다. 그 때 선배님께서 한 유리건물을 가리키셨는데 보니 많이 익숙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건물이 맞다고 하셨다. 말인즉슨, 이 건물의 exact replica로 건축(설계)을 의뢰받았으니, 표절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얘기였다. 아마 건축가는 편했을 것이라고. 옛날에 그렸던 설계도면 그대로 써먹고도 일값을 받을테니.

사실 한국, 성내동의 그 건물은 뇌리에서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 건물이 접한 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가면서 같이 가던 분께서 그 건물을 지은 사람처럼, 그렇게 “성공”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때문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또는 어려서 뭘 몰라서, 몇 마디 질문을 했었다. 건물의 높이가, 사람의 숫자가 아무런 척도도 될 수 없다는 금언을, 바로 옆 “부흥”하는 단체를 마주하며 매일매일 되새김질했을 법한 모임의 한 선생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에 꽤 큰 충격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를 듣지못할만큼 크지도, 해결에 함께하지 못할만큼 작지도 않다”는 작은 구호가 담긴 간판이 있었다. 십몇년이 지나 내가 미국에 갈 때즈음, 내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로 그 맘 때 즈음 내가 소속됐던 그 작은 모임도 드디어 ‘건축’을 시작했다.

뒷북이지만 어제 오늘 아래 본문을 읽으면서 윗글과, 그리고 옛날 생각들이 생각났다.
===

3If anyone teaches false doctrines and does not agree to the sound instruc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o godly teaching,
4he is conceited and understands nothing. He has an unhealthy interest in controversies and quarrels about words that result in envy, strife, malicious talk, evil suspicions
5and constant friction between men of corrupt mind, who have been robbed of the truth and who think that godliness is a means to financial gain.
6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7For we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and we can take nothing out of it.
8But if we have food and clothing, we will be content with that. 9People who want to get rich fall into temptation and a trap and into many foolish and harmful desires that plunge men into ruin and destruction.
10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all kinds of evil. Some people, eager for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griefs.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그러 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 Timothy 6:3-10

p.s. : 이것 또한 교만이 되지 않기를. 하지만 마음이 아파와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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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bthumping, Chumbawamba

이런 음악이었다. 마지막 말대로, 실패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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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Orwell vs Aldous Huxley

http://www.recombinantrecords.net/docs/2009-05-Amusing-Ourselves-to-Death.html

사실, 둘 다 존재하는 세상이다.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Amusing Ourselves to Death by Stuart McMi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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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 deprivation and recovery

여러가지 이유로 그로기가 되어서 한 주를 날리고 있는데 우연히 찾아보다가 이 몰아서 잠자기와 관련된 기사를 발견했다.

수험생을 비롯해서 밤샘을 밥먹듯이 하는 공대생+엔지니어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닐까 싶어 scrap한다. 그러고보면 예전 회사 다닐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밤 안 새던 회사 선배님이 멋있었다 – 배경설명으로, 내가 첫 출근한 날, 아침에 담배피는 회사선배들 만났는데 이미 며칠 밤샌 분들도 계셨음. fab-in날짜에 떨었던 기억에 갑자기 식은땀이…
http://www.nytimes.com/2009/11/03/health/03real.html
요지: 잠 제대로 못 자고 (3-5시간) 나면 골골하다. 그거 하루 늦잠잔다고 회복 안 된다. 일주일이 지나도 졸리지 않는데도 performance가 예전같지 않다(2003, 2008). 하지만 만약 잠 제대로 못 자기 전에 잠을 좀 많이 자놓으면 (10시간~) performance회복속도가 빨랐다(2009). 2009년 논문의 age group은 18-39세였는데, 어린 나이일수록 performance로 봤을 때와 “졸린 것을 인식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잠 덜 자면 객관적 performance는 떨어지는데, 정작 주관적으로 느끼는 졸림은 덜할 수 있다는 얘기. 2009년 논문을 급히 읽어보니, PER3를 비롯한 유전적인 차이로 인해 “밤샘”에 취약한 정도가 다른 결과들 중에 최소한 일부는 이전 잠습관이라든지에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아마 앞으로 그런 genetic epidemiology study도 나올 듯.

기사에서 인용된 논문은 pubmed에서 검색할 수 있다. (우리나라 언론도 이런 reference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리빙센스 기사말고…) 2008년 논문은 여기 인데 지금 학교 바깥이어서 접속에 어려움이…

[1] http://www.ncbi.nlm.nih.gov/pubmed/12603781 2003년 논문
[2] http://www.ncbi.nlm.nih.gov/pubmed/18533328 2008년 논문
[3] http://www.ncbi.nlm.nih.gov/pubmed/19294951 2009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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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목마르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는 실험실, 빌딩에서 들리는 건 타자 소리밖에 없다.

타국생활하면서 사회생활의 범위가 무척 좁아졌다만, 그건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는 소수자들(외국인, 금주자, 직업상 반경1km 밖으로 못 움직이는 자 all above)에겐 매한가지의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감사히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셔틀을 놓쳐버렸다. 그냥 놓아버린다. 어차피 못 갈 것이었어.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에, 이런 고독(?)은 별로 큰 일이 안 된다. 그저 제 식대로 즐기면 되는 노릇.

타국땅에 와서 어렴풋이 깨달은 건, 내 한 구석 내 안에 침잠하고 몰아치는 것을 못 견디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을 목격하고,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것이 요란한 소리든, 아니면 조용한 소리든, 이야기, 그런 것에 목마른 맘이 가끔 준동한다.

허나 남은 건 플라스크들과, 젤과, DNA와, 책들이다. 그저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이는 수밖에.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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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comments

WordPress engine을 쓰고 있는 블로그들에서 신기해했던 건 comment기능이었는데, 깔고나서 잊고 있었습니다. Comment를 입력하면 메일로 날라와서 제가 “승인”을 해줘야하는 구조입니다. 이걸 어떻게 바꿔야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뭔가 comment를 썼는데 없다면 아직 승인처리를 안 한겁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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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

TED를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주변을 보니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아, 몇 개를 업어서 링크를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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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Nature Probable or Capricious? (R. Lewontin, 1966)

다음은 르원틴의 옛날 글을 예전에 번역했던 것이다. 번역한 내용을 웹에 뿌리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러니 읽는 분도 주의하시기를.


Is Nature Probable or Capricious? by R. Lewontin (1966)
자연은 확률적인가 또는 변덕스러운가?

종종 무시되지만 근대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마도 1637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출간일 것이다. 특히 그가 제 5 부에서 동물을 기계로 비유한 부분이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이 bête machine, 즉 동물기계론은 곧이어 라 메트리(La Mettrie)에 의해 home machine, 즉 인간기계론으로 확장되었고, 그 이후의 과학을 성격짓는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기에, 근대 지식체계를 데카르트식 체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주가 한 거대한 기계라는 개념은 곧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즉 우주가 결정적(deterministic)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특정 시점 t0에 관련된 모든 변수의 상태가 주어진다면, 어떤 미래 시점 t1의 우주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우주는 수많은 미분방정식들의 해 다름 아니다. 이 세계관은 물리, 화학 그리고 생리학의 엄청난 발전의 기초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과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정확한 예측들을 가능케 하는 엄밀한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가정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재밌게도 데카르트가 죽은 1650년은 기계론과 엇갈릴 또다른 세계관의 기초가 놓인 해이다. 이 세계관은 그 이후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 진가를 전부 드러내지 못할 터였다. De alea geometriae[1]에 서, 파스칼, 페르마 그리고 호이겐스는 결정론과는 다른 우주관을 고안했는데, 바로 우주는 주사위판이며 던진 주사위의 결과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비유였다. 물론 인간사의 결과가 우연의 결과라는 생각 자체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Alea jact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를 말을 한 첫 사람이 카이사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연을 체계화시켜 한 이론으로 만든 것은 파스칼과 페르마이며, 그 수학화는 베르누이와 그 이후 라플라스에게 공을 돌려야할 것이다.

그 시작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있어 데카르트주의의 그늘은 심지어 이 확률이론의 창시자들조차 그 비결정적인 함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라플라스는 그의 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ies(A philosophical essay on probability)에서 우연한 사건과 결정론적 우주 사이의 모순을 무지의 원칙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사건들이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주가 엄청나게 복잡해서 우리가 연관된 모든 사실들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주사위를 던지는데 가해지는 정확한 힘과, 주사위의 모양, 주사위판의 성질들 등등 주사위의 모든 중요한 정보들을 알아낼 수 있는 악마가 있다면, 그 악마는 주사위를 던졌을 때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라플라스를 따르자면, 우주는 여전히 인과율하에 있지만, 사람의 무지와 오류때문에 정확한 예측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리학에서 확률 개념을 응용한 최초의 중요한 예는 19세기 맥스웰과 볼츠만에 의해 발전한 기체 운동론이었다. 허나 라플라스와 데카르트주의의 영향때문에 이 경우에도 분자 수준에서도 엄격한 결정론이 적용된다는 가정은 유지되었다. 단지 우리가 분자들을 구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체계로부터 실제로는 확률론적인 체계가 도출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맥스웰의 악마와 라플라스의 악마에는 큰 유사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연이란 개념이 갖고있는 형이상학적인 함의들을 물리학에서 전적으로 고려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양자역학은 그 근본부터 反유물론적이고 反데카르트적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사건들이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우주의 기본적인 성질이다. 불안정한 핵의 정보에 대해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이 핵이 언제 붕괴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즉, 실제로 붕괴가 일어난 그 순간까지, 붕괴한 핵과 그 이웃 핵 사이에는 그 어떠한 차이도 없다. 오로지 기술할 수 있는 것은 특정 기간에 전체 중 얼마만큼의 부분이 붕괴할 것이냐라는 점뿐이다. 라플라스와 맥스웰이 상정했던 악마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는 그들의 존재를 반증했다.

여기서 결정론의 역사와 그 최종적 실패를 논의한 이유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확률에 지배받는 우주라는 말조차 특정 현상에서는 너무 확실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우연보다 덜 확실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률론의 기본 공리,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과 통계정보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수의 법칙을 기술하는데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자. 어떤 확률변수의 (표본) 평균값들은 그 확률변수의 참평균값 주위의 일정 구간 안에 대개 분포하는데, 이 때 표본값들의 개수가 점점 커지면 표본평균값들이 분포하는 구간의 범위도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 대수의 법칙(의 한 표현)이다. 표본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관측하고 있는 평균값이 참값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은 점점 확실해진다. 이 법칙은 서로 다른 분포들의 결합같은 경우를 포함해서 매우 다양한 경우에 들어맞고, 확률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수의 법칙을 적용한 예는 [그림 1]에 있다. 무작위로 50개의 수를 뽑아서 처음에는 첫번째 값, 다음에는 첫번째와 두번째값, 그 다음에는 첫번째에서 세번째값, 이런 식으로 나가 마지막에는 50개 수 전부의 평균값들을 계산했다. 그리고 각각의 평균값들은 표본값의 개수를 한 축으로 해서 실선으로 나타냈다. 두 실선은 50개의 수의 배열방법을 각기 달리한 경우 계산한 평균값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표본집단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진정한 참평균 5로부터 표본값의 평균이 크게 차이가 나지만, 표본수가 많아질수록 그 평균값이 참평균값에 근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서 누적평균값이 참값보다 큰 채로 또는 작은 채로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또 숫자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느냐는 표본값이 커짐에 따라 의미를 잃어가며 당연히 모든 50개의 값들이 포함되면 서로 같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확률변수들도 앞서 본 평균값들(그리고 확률)의 행태를 따르지만, 모든 확률분포가 일반적으로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예로 코시분포를 들 수 있다. 이 분포는 겉보기에는 정규분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큰 편차를 보이는 관측값이 나올 확률이 좀더 높다. 바로 이 분포에서 잘 알려져있는 사실은, 이 분포로부터 취한 한 관측값과, 백만개의 관측값으로부터 평균한 추정치가 참값으로부터 비슷한 편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코시 분포를 따르는 표로부터 무작위 수를 뽑았을 경우, [그림 1]은 중앙으로 근접하는 실선대신 x축을 따라 계속 출렁거렸을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코시분포로부터 얻은 단 하나의 관측치는 백만개의 표본과 참평균값에 대해 같은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대수의 법칙을 이런 정보관점에서 달리 기술하자면 표본평균이 갖고 있는 참평균값에 대한 정보가 표본이 커짐에 따라 참평균값에 대한 완벽한 정보수준에 근접해간다는 것이다[2].

표본이 갖고 있는 정보량이라는 개념을 갖고 이제 결정론과 우연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결정론적 시스템에서는 적어도 이론상 어떤 사건이든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우주의 참상태에 대한 완벽한 정보가 있다. 확률론적 시스템에서는 유한한 수의 관찰로는 불완전한 정보밖에 없지만, 이 정보값은 표본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완전에 가까워진다. 나는 여기서 한 시스템이 변덕스럽다라는 것을, 이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없고 (대개의 경우 전혀 정보가 없다) 반복적으로 그 사건을 수집해도 그 시스템에 대한 정보량이 증가하지 않는 경우로 정의하고자 한다. 대수의 법칙은 결코 잊는 법이 없는 측정장치가 이용하는 법칙이다. 즉, 평균값을 계산하는데 더 많은 정보가 사용될수록 측정장치는 참값에 근접한다. 하지만 과거의 값들을 잊어버리는 측정장치는 어느 순간 입력되는 정보량과 잃어버리는 정보량 사이에 균형에 이르러 완벽해질 수 없다. 이러한 측정장치에 있어서 우주는 영원히 변덕스러운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잊어버린 사건들의 반복들은 영원히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을테니까.

자, 이제, 유기체를 우주의 측정장치들로 바라보자면, 이들은 유한한 기억용량을 갖고있기에 각 개체들은 환경의 변덕에 노출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이는 개체군과 종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화상 적응하는 과정을 미래의 환경을 예측하기 위해 과거 환경의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이는 결코 완벽할 수 없고 그래서 진화도상의 개체군이나 종들에게 있어 환경은 항상 변덕스러울 것이다. 개체군들이 기억하는 기작이 대수의 법칙보다 약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그림 1]에서 이용한 난수들을 이용해서 진화과정을 모사함으로써 보이고자 한다. 여기서 한 유전자에 두 개의 대립형질 aA이 있으며, 둘 중 어느 것도 상대에 우성이 아니라고 가정하자. 또한 자연선택과정이 선호하는 대립형질이 경우에 따라 a거나 A라고 하자. 자연선택의 강도는 우리의 난수가 참평균 5로부터 떨어진 정도에 해당된다고 하자. 이 때 간단한 공식으로 특정 세대에 대립형질 a의 개체군 내 비율을 그 전 세대의 비율과 그 세대의 자연선택의 강도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그림 2]는 선택압이 변하는 상황에서 개체군 내의 유전자의 비율의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십자가 표시는 각 세대별 선택압의 강도를 뜻한다. 실선은 50세대 동안 이와 같이 변하는 선택압에 맞추어 변화한 대립형질 a의 비율을 보여준다. 점선은 똑같은 선택압을 반대 순서로 받은 또다른 개체군의 대립형질의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두 개체군의 최종 대립형질의 비율이 약간 다르며, 매우 다른 경로로 이 종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이들의 평균적인 반응이 전혀 달랐다는 점에 있다. 실선으로 기술한 개체군의 50세대 동안 평균 대립형질의 비율은 대략 0.38인데 비해, 점선의 경우 0.57이다. 더해서, 시간에 따른 대립형질 비율의 변동폭은 점선이 실선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전자 비율의 변화는 과거 환경과 단순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만약 과거 환경들이 줄곧 한 방향으로 선택압이 작용했다면, 유전자 비율은 한 극단에 가서 (50세대 중 실선의 개체군이 겪었던 중간 정도 지점) 최근 환경에 매우 무감해지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실선으로 나타낸 개체군의 경우 중간 세대를 지나면서 거의 모든 세대에서 선택압이 평균보다 큰 방향으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표시 참조) 낮은 비율의 대립형질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점선으로 나타낸 개체군은 유전자비율이 중간값에 머물러있기때문에 최근 환경에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과거 환경에 대한 정보는 적다.

일반적으로, 자연선택의 동역학에 따르면 유전자의 대립형질 비율은 먼 과거의 환경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거의 대부분 오래지 않은 과거와 최근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개체군의 유전적 구성은 세대의 길이와 비교해서 매우 긴 주기나 매우 짧은 주기의 환경변화에 반응하기 어렵다. 매우 빠른 변동들에 대한 정보는 생리적인 항상성 기구들에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주기를 갖는 환경 변화는 그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 간에, 변덕스러운 영향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림 2]는 진화의 역사성을 예시하고 있다. 한 개체군의 평균적인 유전적 구성은 환경들의 정적인 확률분포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순서로 일어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환경들이 평균이나 다른 변이와 관련해 대수의 법칙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개체군의 적응에 있어서 환경이 어떤 순서로 바뀌었는지가 중요하다면, 일종의 특수성이 가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반복하자면, 개체군과 종들에 있어서,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자연은 변덕스럽다.

fig1

[그림1] 서로 다른 무작위 수 (평균 5인 확률변수로부터 비롯됨)의 누적평균. y축: 누적평균, x: 표본수. 실선은 똑같은 50개의 수의 순서를 달리한 경우. 점선은 다른 무작위수를 순서만 달리한 경우.

fig2

[그림2] 변화하는 환경(x)하에 유전자비율(q)의 변화. x표시는 환경값(선택강도)임. 실선: x표시로 나타낸 환경값에 따라 유전자비율의 변화양상. 점선: 똑같은 환경값을 순서만 반대로한 경우 유전자비율의 변화양상.

[1] 역주: 찾아본 바로는 실제로 출간하지는 못한 것 같음. 페르마와 파스칼 사이에 오고갔던 확률이론과 관련된 내용을 집대성하려고 했었던 듯. 관련 Reference.
[2] 약한 형태의 대수의 법칙

https://www.jstor.org/stable/129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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