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주 오래전 사건에 대한 뉴요커 기사를 발췌해서 번역해본 적이 있는데, 심너울작가의 기고를 보고 다시 생각나서 여기도 올려본다.
(전략) 문제는, 하지만, 이런 진지한 이슈들이 이런 식으로 제기되면, 이 논란을 피할 수가, 아니 어쩌면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Covington사건 같은 사건은 함정이라 할 수 있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al-comment/what-the-covington-saga-reveals-about-our-media-landscape
이 문제에 대해 최선의 이론틀을 제공한 사람은 Daniel Boorstin이다. 그는 1962년 저작 “The Image: A Guide to Pseudo-Events in America”에서, 인위적으로 보도가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사이비-사건”(pseudo-event)이란, 그 속성이 거의 오로지 보도되고 논쟁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어떠한 사건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표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는 사이비-사건인데, 왜냐하면 그 파티는 오로지 보도되기 위해서 치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가, Boorstin은 많은 진지하고 진정 흥미로운 언론보도들도 기실 유사-사건에 기대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언론기자가 정부 관리에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해서 답변을 받고, 다른 관계자에게 같은 질문을 해서 다른 답을 받았다고 하자. 이제 이 두 정부관계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보도할 수 있게 된다. 그 균열이라는 것이 기자가 질문한 것때문에 생긴 것일 뿐인데도, 그 차이나는 답변들때문에 이제 두 정부관계자 사이의 차이는 보도가치를 갖은 뉴스가 되는 것이다: 즉, 논의할 이슈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언론은 “최신 뉴스꺼리”를 끊임없이 제공해서 독자/시청자들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정치인은 사이비-사건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언론에 오르내릴 수 있는데 — 기자회견, 언론누설, 등등등 — 이 모두 보도가치가 있고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보도가치란, 사건 자체의 본질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윤색하고 각색”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들은 물론, 이런 식의 윤색과 각색을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런 시스템의 문제는, “사이비-사건들이 다른 사이비-사건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만들어낸다”라는데 있다고 Boorstin은 지적한다. 공화당의원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급진 이슬람 테러리즘”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면, 이건 사이비-사건이다. 오바마는 이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데 — 왜 이런 용어를 쓰지 않는지 설명함으로써, 이 사이비-사건의 타래에 하나의 연쇄를 더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사이비-사건들은 증식하고, 언론지형에 퍼져나가면서 진짜 사건들을 압도해버린다. 진짜 사건들은 좀더 지역적이고, 그렇게 극적이지 않기때문이다. Boorstin은 우리가 “정치”라고 말하는 세상의 대부분이 유사-사건으로 이뤄진 미래를 그린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북 치고 장구치면서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행태를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중요한 것 — 여론이기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비용을 지불한다: 우리의 주의가 특정 방향으로 인위적으로 몰리기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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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nundrum, though, is that, once serious questions are raised, it’s hard—and perhaps even wrong—not to debate them. It’s in this sense that episodes like Covington are a trap.”
우리의 주의력이야말로 소중한 자원인데, 마치 몇 년동안 우리의 몸을 숙주로 삼아 휩쓰는 바이러스처럼, 한국 미디어의 어떤 행태가 병처럼 휩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