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foreignaffairs.com/articles/138737/charles-walton/the-missing-half-of-les-mis?page=show
The Missing Half of Les Mis
The Film’s Pessimistic View of Revolution — And Ours
영화가 놓친 소설 레미제라블의 다른 절반
영화의 시선은 혁명에 대해 비관적이다 — 우리의 시선도
찰스 왈튼
블록버스터 영화가 있기 전에, 블록버스터 책들이 있었다. 1862년 출판된 빅터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그런 책이었다. 마케팅에 능란했던 출판사 덕분에 프랑스 낭만주의의 금자탑이라할만한 이 10권의 시리즈는 유럽과 북미에서 바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기가 얼마나 컸으면,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같은 작가들은 그들의 저작들이 빛바래지 않기 위해 출판을 연기했을 정도다. 일부 고매한 비평가들은, 마치 요즘 돌풍을 일으키는 헐리웃 영화에 대해 그러하듯, 이런 열기를 불쾌해했다. Edwin Percy Whipple이 The Atlantic誌의 서평에서 이 책의 출간과 함께한 “요란한 광고공세”를 Ebenezer Scrooge(역주: Charles Dickens의 Christmas Carol의 주인공)에 비견하면서 한 말들이 한 예다: “출판 광고 중 가장 지저분하고”, “Barnum (역주: 19세기의 유명한 서커스업자, 요란한 광고로 유명)이 울고갈만하다”.
이런 열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국 프랑스 안에서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은 양극을 오갔다. 어떤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소설이라고 추켜세웠고, 다른 이들은 말도 안 되고 감상적이라고 깎아내렸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불온하다고까지 했는데, 이들이 걱정하기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치적 행위였고 소설에서 위고가 묘사한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법은 무장봉기 매뉴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위고는 그의 혁명에 대한 동조를 부인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전에 혁명에 참여했던 독자가, “이 책은 혁명을 10년 앞당길 것이다”라는 평을 자랑스러워했다.
빅터 위고는 칼 맑스는 아니었으나 혁명을 통한 진보를 믿었다 — 이 부분은 Tom Hooper의 새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본 관객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위고의 고전을 바탕으로 만든 매우 인기있는 뮤지컬(파리에서 1980년 초연)을 옮긴 것인데, Hooper의 연출은 놀랄만큼 멋지고 훌륭하나, 원저자 위고의 한 면만 보여주고 있다: 혁명가로서의 위고를 뺀, 종교인으로서의 위고만 말이다. 영화는 카톨릭적 양심의 여정을 통해 개인구원의 서사만 보여주고, 정치적 폭력을 통한 프랑스의 집단적 구원은 무시하고 있다.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중심을 관통한다. 영화 초입 카톨릭 사제가 전 죄수 장발장이 은기구를 훔친 혐의로 수감될 위기에서 구해주는 장면서부터 시작해서(사제는 경찰에게 장발장이 그 은기구를 훔친게 아니라 자신이 선물해줬다고 거짓말한다) 장발장이 평생에 걸쳐 속죄의식으로 구제와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장면을 지나(그는 자기가 고용했던 Fantine을 매춘으로부터 구해내고 그녀가 죽을 때 그녀의 딸 Cosette를 키우겠다고 한다), 마지막에 장발장이 그의 미래의 사위 Marius를 바리케이드로부터 구출한 후 그의 과거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러선, 우리는 장발장 뒤로 명명백백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보게 된다. 장발장이 죽을 때 — 물론 수도원에서다 — Fantine의 영이 마치 천사처럼 그를 데리러 내려와 합창단이 강조하듯 “바리케이드 넘어 어딘가”, “주님의 정원으로” 데려간다.
물론, 종교는 위고의 원저작의 중심주제다 — 허나, 혁명 또한 그러했다. 사실, 레미제라블을 쓴 위고의 목적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이래로 대립하던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졌으며 브르조아(중산층 유산계급)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이 원칙을 위해 일어나 싸울 것을 독려했다. 브루조아의 몰락을 믿고 투쟁했던 맑스와 달리, 위고는 당시 나폴레옹 3세 (1851-1870)의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 자유와 정의를 대가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상황에 만족하는 중산층이 부끄러운 타협으로부터 깨어나길 호소했다. 소설 속의 화자는 “(민주적) 원칙이 결여된 평화는 전쟁보다 더 어렵고 부담스럽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전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Hooper의 영화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혁명적 이상주의를 바라본다: 오도되고, 부질없는 것으로. 관객들은 이를테면, Marius의 혁명동지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고 믿게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을 통해 어떤 명확한 진보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최후의 만찬”을 치뤘던 곳의 빈 의자와 식탁을 돌아다니면서, Marius는 “여기서 이들은 혁명에 대해 토의했네 / 여기서 그들은 불을 붙였다네 / 여기서 그들은 내일을 노래했고 / 그 내일은 오지 않았다네.”라고 노래한다.
혁명을 통해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관객들은 생각할 것이다. 오로지 종교를 통해 올 뿐이라고. 이 시각은 위고의 혁명에 대한 낙관론과,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그가 묘사하는 혁명과 같이 실패한 혁명들에 대한 그의 깊은 연민을 가려버린다. 실패한 1832년 봉기의 절정, 바리케이드 장면에서, 위고는 독자들이 혁명가들의 대의에 공감하기를 바랬고, 그래서 그 뜻을 이어 투쟁을 계속하도록 고취하고자 했다. 소설의 화자는 말한다 : “그들이 성공하든 안하든, 미래를 위해 영광스럽게 투쟁하는 이들을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은 신의 역사(役事)”며, 그리고 혁명에 의한 순교는 “진보를 향한 순수한 선물”이라고 위고는 소설 속에서 쓴다.
이렇듯 위고는 종교와 혁명을 신성한 국가적 희극으로 승화시키려 했는데, 이 시도는 그가 동시대인들과 공유했던, 정치적 양심에 따라 필생동안 고민한 고뇌의 산물이었다. 18세기말과 19세기에 걸쳐서, 프랑스는 반복적으로 혁명, 쿠데타, 그리고 군사적 패배에 시달렸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입헌군주주의, 공화주의, 권위주의적 자유주의, 반동적 보수주의, 사회주의와 다양한 파생이념이나 그 모든 치환, 조합들이 백가쟁명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섞어찌개가 되어버렸다(책에서 Marius는 그의 공화주의자 친구들과 구별하며 “나폴레옹 민주주의자”라는 꽤 이상한 조합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정치적 스펙트럼 하에 놓인 이 모든 이념들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위고의 능력은 그의 특이한 혈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웠을 부모 사이의 결합의 결과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1공화국(1792-1804)의 장교이자 나폴레옹 치하 장군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방드(Vendée) 지방의 골수 카톨릭 반동 집안 출신이었다. 이 지방은 공포정치 (1793-94) 시기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폐허로 변한 곳이었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이러한 상처들을 치유하고, 카톨릭과 공화주의의 프랑스를 통합하고자 했다.
왜 영화 및 뮤지컬은 혁명을 위고처럼 숭엄한, 어쩌면 비극적인 변화의 도구로 보기보다 의미없는 이상주의로 묘사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 스스로의 혁명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수십년간, 냉소주의가 이상주의를 대체했고, 혁명은 독재정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유토피아주의는 기요틴, 굴라그(역주: 구소련의 노동수용소. 대강 시베리아형무소, 아오지탄광, 요덕을 떠올리면 됨), 대량학살을 불렀지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는 혁명을 위고의 낙관적 렌즈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이었던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비관적 렌즈로 바라보게 되었다.
위고와 토크빌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생애를 살았다. 둘 모두 19세기 첫 10년에 태어났고(각각 1802년과 1805년), 공포정 시기 박해받았던 가문에서 나왔다. 1820년대의 젊은 시절, 이 둘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 찰스 10세의 후원을 받았다. 위고는 1825년 찰스의 대관식을 기리는 시를 짓기까지 했다. 1830년 7월 혁명의 결과 루이-필립의 입헌 군주제가 수립됐을 때, 둘은 모두 좌측으로 이동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유럽의 미래로 미국의 정치제도를 꼽았고, 위고는 사형제 폐지에 대한 글을 쓰고 당대 사회정치적 불평등을 고발하는 소설을 계획했다. (이는 수십년 후의 레미제라블로 실현된다) 둘은 모두 1841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둘 모두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정부가 무너지기 전, 이 정부를 위해 중요한 보고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 — 토크빌의 알제리 보고서와 위고의 폴란드 보고서가 그것이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늬만) 입헌 군주정이었던 루이필립이 물러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둘 모두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둘 모두 그 해 6월 노동자 봉기에 반대했다. 위고는 바리케이드 뒤에서 농성하는 봉기자들과 대화하려고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Place des Vosges거리의 그의 집 앞문에 14발의 총알자국을 남겼다. 둘 모두 1851년 루이-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한 대가를 치뤘다. 루이-나폴레옹은 국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 (나폴레옹3세)에 등극하는 길을 열었다. 토크빌은 잠시 투옥됐고, 위고는 19년간 망명을 해야했다.
바로 이 1851년 쿠데타를 끝으로 이 둘의 혁명에 대한 관점이 갈리기 시작했다. 토크빌은 절망하고, 만성병에 시달리며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The Old Regime and the French Revolution을 집필했다. 이 책은 비판적 시점에서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을 고찰하여 왜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건 혁명들이 공포와 압제로 끝나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그의 생각에 이유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계몽됐으나 경험이 없는 이들이 벌이는 “추상문학 정치abstract literary politics”에 있었다. 짧게 설명하자면, “철학자들이 주권자가 되면 피바다가 된다”. 역사가들이 그의 주장 중 일부는 반박했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혁명가들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구체제에서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토크빌의 혁명에 대한 비관주의는 현재 우리의 여러 정치적 상상에 짙게 배어있다. Hooper의 영화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있는 것은 물론이다.
토크빌이 혁명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으로 변해갈 무렵, 위고는 더욱 더 확고하게 혁명을 받들었다. 둘 모두 1851년 제2공화국을 압제한 루이-나폴레옹에 반대했지만, 위고는 쿠데타에 반대하는데 더 유력한 역할을 맡았다. 위고는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리케이드를 칠 것을 촉구했다.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1832년 실패한 봉기의 비극적 장면과 비슷하게, 1851년 12월의 봉기는 아주 잔인하게 진압됐다. 위고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찍어서 파리 거리 곳곳에 뿌렸던 위고의 친구이자 동료는 Faubourg Saint-Antoine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그 날 학살의 현장을 훑어가면서, 위고는 머리에 총알이 두 발 박힌 일곱살 어린이의 시체에 다다랐다. 그 이미지는 수년간 위고를 사로잡았고 그의 몇몇 저작에 영감을 줬다.
레미제라블은 위고와 그의 독자들에 있어서 일종의 치료였다. 책은 혁명의 비합리적이고 잔인한 측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국가적 구원을 위한 도구로 경배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신성화했다. “인류를 비등점에 이르게 한 문제들을 지나, 우리는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전진했음을 목격한다… 역사의 진보는 혁명들을 통해 올 것이다,” 그렇게 위고는 썼다.
영화가 위고의 혁명에 대한 낙관을 포착하는데 실패했지만, 최소한 이 소설의 또다른 중심주제를 다루는데에 있어서는 면피를 했다: 비참한 사회현실고발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레미제라블 영화는 지난 수십년간 프랑스 대혁명의 순간을 영화적으로 해석했던 다른 영화들로부터 구별된다. 예를 들어 Andrzej Wajda의 당통Danton (1983)과 Eric Rhomer의 영국 여인과 공작The Lady and the Duke (2001)는 토크빌적 관점을 차용하여, 현실 속의 빈자들의 비참한 현실보다 엘리트들의 비극적 이상주의에 집중한다. 이전 영화들에서 그나마 일반인을 묘사한 장면들에서 사람들은 격분한 채로 창 끝에 머리를 달고 다니거나, 빵을 구하고자 긴 줄을 서고 있는 정도뿐이었다. 그나마 빵줄이 긴 것은 혁명가들이 사회주의자들이었기때문이라는 암묵적 가정과 함께 말이다.
Hooper의 레미제라블은 한편, 하층계급을 인간적으로 바라본다. 일자리를 잃고 비참한 매춘녀로 전락한 Fantine의 고통은 Ann Hathaway의 슬픈 목소리를 통해 강하게 전달된다 (티슈를 준비하세요). 하지만, Hooper의 빈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양식화되어 있다. 부자나 빈자나 가릴 것없이 벗겨먹으려하는 비열한 여관 주인집 Thénardier부부는 영화에선 1980년대 팝스타 Adam Ant나 Cyndi Lauper의 할로윈 버전같은 섬뜩한 모습으로 묘사됐다. 선정적으로 그려진 불결함과 부도덕 행위들은 때론 충격적이기보다 재미있을 지경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미지들과 노래는 19세기 프랑스의 비참한 현실 –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매춘으로 생존하고 버려진 아이들 (기억에 남는 Gavroche같이)이 봉기에 기여하고, 떠돌이 예술가들과 거리 연예인들이 갖은수를 써서 영문을 모르는 구경꾼들을 벗겨먹는 – 을 보여준다.
아랍의 봄이 한창인 이 때에, Hooper의 영화 레미제라블이, 혁명에 대한 달라진 시각에 기여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튀니지의 억압적 경제, 정치 질서에 대한 좌절이 Mohamed Bouazizi를 분신하게 만들었고, 이 사건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혁명을 점화했다. 최근 인터뷰들에서, Hooper는 그의 영화가 이러한 흐름 속에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의역).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본이 됐던 뮤지컬로부터 벗어나 위고의 혁명에 대한 믿음, 혁명이 비참함을 개선할 능력이 있다는 희망, 혁명적 변화를 통해 민주주의와 종교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복원시켜야만 했다. 위고의 소설이 21세기에 가지는 의미를, Hooper의 영화는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기회들을 놓쳤다는 사실 — 구원의 매개로 혁명 대신 기독교가 제시됐다는 점 — 은 그리 놀랍지 않다. 결국에는, 이 영화가 미국에 개봉된 일자는 12월 25일이지 7월 14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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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걍 거칠게 번역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