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번역해봤던 글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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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에서 크루그먼말고 가끔씩 보는 칼럼이 David Brooks이다. 내 딴에는 글을 잘 쓰고,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기에, (언제나 동의하는 건 아니고, 좀 얄팍하거나 편협할 때도 종종 있지만) 이리저리 궁리할 꺼리를 던져준다. 그래서 보수주의자이고 매케인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림보같은 강성 “보수”주의자에게 까이는 것일테다. 최근 칼럼에서 “시드니 어워드”라고 하면서 잘 쓴 긴 글들을 추천했는데, 처음에는 Sydney Hillman Award를 말하는 건줄 알았다. 2008년 수상자 목록을 보니, 그냥 Brooks관점에서 제가 보기에 잘 쓴 글 추천한 것 같다. 그 중 한 글이 눈에 들어왔는데, 한국의 상황이나 여러가지로 꽤 재밌게 읽었다. 남는 짬짬이 시간동안 조금씩 (급하게) 번역을 해봤다. 그냥 copy & paste하면 재밌는 글을 읽는 사람이 한 1/10이 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시간이 좀 되고 영문이 되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따라 영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제목은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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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eeklystandard.com/Content/Public/Articles/000/000/015/921taekw.asp?pg=2
버락 오바마나 존 매케인이나 이번 가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금융위기에 대해서 의미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캠페인 전략을 수정하기보다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처럼, 그들도 안전하게 행동했다. 허나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는 아직 위기가 분명해지기 전에 상당한 정확도로 우리 곤경을 내다봤던 후보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론 파울말이다. 그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의 거의 모든 연설때마다 거품, 무모한 신용팽창, 그리고 현재 정책의 “지속불가능함”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왜 그가 주장했던 상식적인 해결책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일까? 왜냐하면 금융위기 중에는 상식은 별로 쓸모가 없기때문이다.
이 역설은 19세기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월터 배짓의 위대한 발견이었다(1860-1877년까지 이코노미스트지 편집자 역임). 99%의 상황에서 상식은 실용주의의 동의어이다. 그러나 심각한 은행위기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 즉,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 푼이라도 아끼는 일 –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배짓의 <<롬바르드 거리>>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영국은행을 바라본 책이다. 이 책은 또한 고도화된 경제에 문제가 생길 때 정치 및 금융 지도자들이 행동해야하는 원리들을 담고 있다. 이 원리들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단순한 개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매우 우울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반면에 실제적이다. 그것이, 이른바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배짓의 책이 여전히 금융위기들 – 현재 위기를 포함해서 – 에 대한 대응책을 고민할 때 기초를 제공하는 이유이다.
<<롬바르드 거리>>는 1873년에 출판됐다. 그 바로 몇 해 전에 Overend, Gurney & Co라는 은행이 일천백만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하고 급작스럽게 파산하여, 투자자들이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예금자 인출사태가 벌어졌었다. 이 사건은 “장사에 있어서 악질적인 수법들을 총망라한 교본”이 되었다. 이 위기는 영국 금융 및 정부에 엄청난 인상을 남겨서 그 이후 141년간 다시는 예금자 인출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 두 번째 인출사태는 2007년 여름 Northern Rock이 무너졌을 때 일어났다. (영국 투자자들은 미국인들에 비해서 더 긴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현재 짊어지고 있는 악성 서브프라임 모기지들, 그리고 이를 담보로한 증권은 2001년 엔론이 우리 스스로의 악질적인 수법들의 교본이 된 이후에 발생한 것들이다.) 이 Overend, Gurney 위기와 그 이후의 위기들에서 공황을 방지하는 책임을 진 것은 영국은행이었다. 영국은행은 신용을 제공하고 (injecting) 사람들을 구제함으로써 공황을 방지했다. 배짓은 이를 찬성했다. 많은 일반상인들은 상품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물품공급자들에게 대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신용이 없다면 이들은 패가망신하는 것이었고, 이들이 몰락은 대부자들에게 퍼져나갈 터였다. 이건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현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경제체제는 현대 정치체제-민주주의-와 꽤 불편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기실, <<롬바르드 거리>>에서 여러 차례 배짓은 호황과 불황의 문제를 “영국 상업의 점점 더 민주적 구조를 띄는” 과정 속에서 이해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기관들이 마치 개인처럼 행동할 때 가장 편안해한다. 위기상황에서, 은행들은 – 다른 이들과 똑같이 – 조건반사적으로 돈을 쌓아놓는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반대로 움직여야한다. 즉, 자유롭게 대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국은행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으로 상식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식에 반한다는 것이 이 조치의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이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최종 대부자로서의 필요한 의무를 오로지 법을 어김으로써만 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영국은행 운영, 그리고 그 건전성을 담보하는 것은 1844년에 제정된 은행법이었다. 이걸 건전한 금전체제(a regime of sound mone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법은 준비금 대비 찍어낼 수 있는 화폐에 엄격한 제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경제상황이 괜찮을 때 이 조건은 잘 지켜졌다. 하지만 배짓이 글을 적고 있던 사반세기 당시, 이미 법은 3번이나 정지됐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배짓이 적기를, “비슷한 상황에서 이 법 적용을 정지하지 않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영국의 지급능력을 보장하는 법은 엄격한데, 다만 누군가가 그 법 적용에 예외를 둬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그랬다.
더 웃긴 것은, 영국은행이 단 한 번도 최종대부자로써의 역할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은행 총재들은 심지어 그런 의무 자체를 부인하기도 했다. 배짓은 영국은행의 역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은행과 대중을 포함해서 모두가 분명히 이해해야할 것은, 영국은행이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준비금(banking reserve)를 갖고 있으므로, (영국)은행은 내적 공황상태에서는 즉시, 조건없이 대출해줘야한다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장들이 그런 의무를 숨겼던 이유가 있었다. 만약 중앙은행이 일반은행들을 관대한 신용제공으로 구제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해버리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만들어낼 것이기때문이다. 배짓이 존경했던, 영국은행장 톰슨 핸키 (금융관련 저자 제임스 그랜트는 최신저작 “미스터 시장도 오판한다”책에서 그에 대한 글을 헌정한 바 있다)는 배짓이 영국은행이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관점을 “이 나라 통화 또는 은행업계에서 제기되었던 가장 해로운 주의주장이다”라고 했다.
실질적으로는 배짓이 옳았고 핸키가 틀렸다. [영국]은행가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원칙적으로는 핸키가 맞았고 배짓이 틀렸다. 은행이 도산할만한 실제의, 설득력있는 위협이 있기전까지는, 영국은행의 보증의 효과는 거품이 발생할 때 이미 포함되어서 거품이 터질 때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햇킨식 원칙과 이를 배반하는 배짓식 적용 – 요즘 말로 말하자면 “전략적 모호성”인 것이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도 비슷한 배합을 요구한다. 중앙은행의 노릇은 그래서 종종 치킨게임이라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은행들이 충분히 겁을 먹지 않으면 [너무 많은 리스크를 떠안고 막 가서 거품이 생기면] 끝장을 보기도 한다. 9월달에 미 재무성이 리먼 브라더스를 구제하지 않아 금융계가 경악에 빠졌을 때가 분명 그런 순간이었다. 배짓의 관점에서는 재앙이었지만, 핸킷의 원칙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로써 납세자가 부담하는 보험(중앙은행이 구제해줄 것이라는 약속)에 가입해있다고 믿으면서 합리적인 수준 이상으로 자산에 투자하려는 유인을 줄일 것이다. 공화당의원들이 9월달에 재무성의 TARP를 거의 부결시켰던 것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중앙은행이 책임있는 모습(accountable)으로 행동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명료한 규칙들과 투명성을 갖고 운영되어야한다고 누구나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규제를 바라볼 때 놓치는 것은 대개 가장 효과적인 규제는 규제가 변덕스럽고 불투명할 때라는 것이다. 그 어떠한 규제 체계도 오래 사용하면 취약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만약 경제적 문제에 규제라는 것이 예측 가능하다면, 똑똑한 투자자들은 그 예측가능성에 “승부를 걸” 방도를 찾아낼 것이다. 이 상황은 항우울제를 사용하는 것과 비유해볼 수 있다.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항구적인 훙우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항우울제는 오직 정신 (또는 뇌?)이 그 항우울제의 작용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만 효과적이다. 그런 후에는 또다시 익숙하지 않은 약을 처방해야한다. 같은 식으로, 규제체제가 얼마나 좋은 내용으로 채워져있을지라도, 시장 지배적 경기자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지 못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
배짓은 처음부터 은행업의 실질적 현실이 역설에 역설을 거쳐야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중앙은행의 활동이 그 시작부터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그의 평가의 단서는 앤드류 잭슨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은행업은 단순해야한다” 그는 말했다. “만약 복잡하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게 복잡한 일이면 은행가는 위임된 일을 잘 못하고 있거나 실상 장사가 없는 것들에 복잡한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배짓에 따르면, “모험은 상거래의 일상이지만, 신중, 난 거의 소심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 은행업의 일상이다.”
한 사회의 현금 보유를 중앙집중화하는 것은 복잡하고, 무모하며, 인위적인 것이다:
자유롭게 내버려둔다면, 그 어떤 종류의 장사에 있어서도 장사를 할만한 적절한 규모의 경쟁자들이 공존하는 공화제가 형성되기 마련이고, 은행업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 어떤 상업활동에 왕조가 구축된다면, 그것은 어떤 부자연스러운 이득, 그리고 어떤 개입의 징조라고 할 수 있다. … 은행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는 모든 은행들이 자체 현금보유고를 지니고 있고, 충분히 보유금을 쌓아놓지 않으면 망한다는 원칙 위에 있는 것이다.”
배짓이 생각했던 자연스러운 은행규모는 당대보다 그 이전 18세기를 생각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배짓은, 사실상, 완벽히 틀렸다. 자유시장 조건에서 자연스러운 경향은 합병, 더 나아가 독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소기업들이 더 바람직하다면, 이들을 정부를 통해서 보호하는 수 밖에 없다 – 이게 테디 루즈벨트식의 반 트러스트법을 통해서든, 프랑스식의 담배회사 보조금식이든, 유럽연합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했던 식의 소송으로든, 또는 님비식 반 월마트 캠페인으로 지역 소상점 보호운동이든 말이다. 배짓은 가끔 이 점에서 모순된 입장을 보였는데, 이를테면 “큰 은행은 점점 더 커지고, 작은 은행은 점점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경향을 부자연스럽다고 평한 것으로 볼 때 이런 경향을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맑스와 동시대인물인 배짓이 기업들이 진화하는 양상에 대해 맑스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 경제에 예측가능한 불안정성이 있다는 믿음과 관련해서 배짓은 맑스와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가 위태로와지거나 투기가 발생하는 데 은행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 배짓은 1720년대를 뒤흔들었던 남해버블(남해포말사건)과 미시시피 거품사건* 당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은행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했다. 하지만 현대 은행업은 설계부터 위태롭다. 배짓이 이르기를, “이 체제의 강점은 정확히 그 정교함에서 나온다. 또 그 위험성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점, 정교함, 그리고 위험성은 모두 같은 근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이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레버리지Leverage.
책의 첫머리에 배짓은 최소한 경제가 호황일 때 신용으로 사업하는 이들이 구닥다리 자본가들을 “괴롭히고 압박하며, 심지어 퇴출시키는지”를 절묘하도록 단순한 예를 통해 보여준다. 여기서 구닥다리 자본가란 돈을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는 원칙을 지키고 제 현금을 써서 사업하는 멍청이들을 가리킨다:
만약 어떤 상인이 5만 파운드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자. 연 10%의 이익을 얻으려면 매년 5천파운드를 벌어야하고, 그에 알맞게 제 물건들에 값을 매겨야할 것이다; 한편 만약 다른 상인은 1만 파운드 밖에 없지만, 4만 파운드를 융통해서 (이 정도는 이 시대 사업에서 그리 극단적인 예가 아니다) 5만 파운드를 마련하면, 그는 똑같이 5만불의 자본금을 지닌 셈이고, 훨씬 싸게 물건을 팔 수 있게 된다. 만약 그가 내야할 이자율이 5%라고 하면 그는 연간 2천 파운드를 지불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구닥다리 상인과 똑같이 연간 5천 파운드를 번다면, 이자를 다 지불한 다음에도 연간 3천 파운드, 그러니까 자기자본 1만 파운드 대비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이윤율을 달성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인들이 30퍼센트보다 훨씬 더 적은 이윤율로도 만족하므로, 그는 만약 원한다면, 그 이득의 일부를 포기하고 재화에 대한 가격을 낮춰서 구닥다리 상인 – 제 자기자본으로 장사하는 인물 – 을 시장으로부터 몰아낼 것이다.
나중에 배짓은 이런 레버리지의 필요성이 진짜 물건을 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돈을 파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은행가는 상인이 대출을 받지 않을 수 없는만큼 대출을 해줄수 밖에 없다:
(증권)중개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 맡겨진 매 6펜스마다 이문을 물어줘야하고, 이렇게 상시적으로 이자를 물어줘야만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중개자는 최대한 많은 돈을 굴려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든 돌려줘야할 돈을 갖고 있지만, 그걸 일반적인 은행가가 보유하고 있는만큼 현금을 쌓아놓을 수가 없는데, 결국 이자지급부담이 그에게 돌아올 것이기때문이다.
결국 금융에서, 레버리지를 갖을 수 있으면, 레버리지를 갖아야만 한다. 일단 레버리지를 갖는 순간,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레버리지를 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에서 통화량을 늘려야할지 줄여야할지 논쟁한다해도, 이들이 언제나 금융계로부터 요구받는 것은 더 큰 레버리지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지어 민주정에서조차, 통화정책 도구들만큼은 투표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떨어져있고, 더 나아가 숨겨져있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은 나선형으로 끝없이 팽창할 것이고, 거품은 불가피해진다. 이런 투기적 악순환이 “탐욕”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이다 – 물론 탐욕이 인간 본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르겠지만. 신용의 나선형 팽창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그리고 Bernard de Mandeville이 벌들의 우화에서 기술한 세계의 어두운 측면이다. 사회가 이기적 동기에 따라 제각기 움직이는 행위들로 향상될 수 있는만큼, 그 누구의 탐욕과도 상관없는 이유들로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돈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은 도덕적이어야하지만, 신용 체제는 도덕적 책임을 엉망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배짓은 런던의 금융구역을 “나라에서 조용히 저축하는 이들과 열심히 고용하는 구역들 사이의 중개자”로 묘사했다. 모범적인, 청교도정신의 서포크(Suffolk) 농부들은 안전한 곳에 그들의 돈을 맡기기를 원한다; 랭카셔의 사업가들은 일을 벌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런던 은행가들 덕분에, 둘 모두 바람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서포크(Suffolk)의 낙동업자가 “도덕적”인 쪽이고 (저축하니까) 랭카셔의 투기자를 “비도덕적” 편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도박을 하는 거니까). 하지만, 은행체제가 개입하는 순간, 둘 모두 도박을 하는 셈이고, 둘 모두 저축을 하는 셈이다. 좋은 시절에는 그저 입으로 상투적인 구도에 따라 근면한 농부들이 금융가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라고 우물거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불경기가 찾아오면, 비는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들 모두에게 내리는 것을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현재 집이 저당잡히거나 신용카드한도가 다한 많은 미국인들은 탐욕스럽고, 분수에 넘치고, 브랜드에 중독되어 있고, 물질주의적인 쇼핑중독자들이며, 내가 뭘하든 세상이 자신들을 먹여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금융기관들만큼이나 무분별한 차입에 기반한 체제의 덫에 걸린 이들이다. 이 체제에 참여가 강제된 것은 분명 아니지만, 또 그저 선택사항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한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사람의 구매력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경제적 지위에 의해서도 결정되기때문이다. 내 이웃들이 더 빨리 부유하게 되는 것에 원통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저 나쁜 성격 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샘할게 아무것도 없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람들이 가장 본질적으로 여기는 재화를 따질 때 – 적절한 짝; 어린아이들의 교육; 집의 평수, 위치, 얼마나 멋들어진지, 그리고 얼마나 편한지 – 절대적인 부보다 중요한 것이 상대적인 위치가 아닌가.
1990년대에 돈을 저축은행에 넣어둔 사람들은 우리가 동의하면 안될 행동들, 이를테면 “남돈을 제 돈 쓰듯” 돈을 빌려서 주식에 투자를 한 사람들에게 졌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채권투자를 한 사람들도 10년간 연간 평균 15%의 이자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그 이유가 노동시장에서 뭘 했느냐보다 주식시장에서 뭘 했느냐에 연관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게 정의로운건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젠 분명히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지난 호황기때는 주식과 주택투기를 통해 사회적인 위치가 바뀌는 일들이 왜 맞는가에 대해 온갖 합리화가 난무했다. 그 중 하나는 주식에 돈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주택을 구입하기보다 월세로 사는 사람들이 바보 멍청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종류의 논설은 퇴직 저축을 해외 주식시장에 투자하지 않은 대중들이 바보라고 했던 대통령이 당선된 2000년에 절정에 달했다.
배짓은 투기 광풍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들을 휩쓸고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배짓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대위기들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많은 가구들이 투기에 뛰어든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투기가 처음 시작될 때는 그 투기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그 참여가 제한적이었다가, 매일매일 오르는 가격과 주변의 열기에 휩쓸려서 결국 참여한 이들이다.” 탐욕스러운 이들은 대가를 치루기 마련이지만, 거품이 터질 때 가장 큰 대가를 치루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인 투기열풍과 붕괴에서 발견하는 비극적인 인물들은, 해가 갈수록, 그 광풍이 허상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게 자기확신이 가셨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권유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투기에 뛰어들어서 (시장의 상투를 잡아) 쓸려버리는 이들이다. 얼마나 짖궂은 역설인가! 그의 순간적인 흔들림에 더해서 그 길고 지혜로왔던 인내마저 형벌일테니.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게 흐른다.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와 사회학자 다니엘 벨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 고전적인 관점에서는, 자본주의는 근면한 이들을 보상하고, 근면함은 부를 만들어내며, 부는 게으름을 초래하고, 게으름은 자본주의에 위기를 초래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정말 지극히 심각한 상황에서는, 자본주의가 정말로 근면과 검약의 덕목과 관련이 있는지 되물어볼 수 있다. 진정 자본주의적 덕목은 낙관주의와 운처럼 보인다. 중앙은행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이런 문화적 모순들은 자본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그 근본요소처럼 보인다.
중앙은행이 직면한 문제는 경영자들을 보상해서 빗나간 시스템에 반응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에 대한 반대가, 우파 (론 파울, 짐 버닝)에서 나오든 좌파에서 나오든 (버니 프랭크, 윌리엄 그라이더), 모두 대중주의적인 이유이다. 배짓은 대중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익숙했다:
특별한 정보를 제시하는 거의 모든 [영국은행]총재들은 사적 이익을 챙긴다는 의심때문에 고생한다. 그들은 그런 정보를 현업에 종사할 때 얻었을 것이고, 그런 사업들은 중앙은행의 정책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연유로 중앙은행이 생생한 정보로부터 유리되면 결코 안 된다.
배짓이 핸크 폴슨 재무성장관에 대해 여러가지 잘못을 지적하겠지만, 현재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비판 – 폴슨이 예전 월스트리트 동업자들 – 그는 골드만 삭스에서 CEO로 여러 해 일했다 – 과 너무 가깝다는 비판은 배짓에게는 잘못된 비판으로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월스트리트야말로, 바로 그 “신용의 수준”이 결정되는 곳이기때문이다:
특정한 시점에서의 신용수준은 다른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결정되어야하는데, 즉, 시도해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준비금”이 적정한 수준의 신뢰를 보장할 것인지는 경험을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용이 성공적으로 다시 회복되는 때는 바로 금융 엘리트들이 “이 때”라고 얘기할 때다. 신용은 지배계급의 기분과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경제가 신용에 기초해있다는 것은 동물적 신비들에 기반해있다고 말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매력, 긍지, 감, 뽐내기… 그게 경제의 기초란 말이다. 거의 무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배짓의 관점에서 볼 때, 위기의 순간에 중앙은행의 관점에서 볼 때, 고도화된 경제는 원시경제와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대영제국과 프랑스에서 각기 발생했던 대형 주식투기사건
**도덕적 해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라는 뜻은 아니다. 글의 나중에 분명해진다
*** 그러니까 남들이 부당하게 투기로 더 잘 사는 것, 시샘해서 따라하는 것이 그 개인의 잘못(나쁜 인격)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