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atrickhenrypress.info/node/205926
원래 fivethirtyeight blog에 올라왔던 글(2010년 5월 22일, 영국 총선 직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인데, NY Times에 통합되면서 과거 자료들을 링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전체 본문을 실은 링크를 임의로 올렸다.
제목 : 꼬인 선거제도가 뒷받침한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apartheid)
저자 : Dan Berman
지난 몇 주간 걸쳐서 이뤄진 상대다수대표제(plurality system; 그냥 선거구에서 1등한 사람 당선되는 것. 나머지 표는 사표가 된다) 선거제의 단점에 대한 논의는 이해할만한 것이다. 특별히 이 방식의 선거제도가 편향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주였다. 영국과 관련해서는, 이 제도가 노동당은 과대대표하고 제3당인 자유민주당을 과소대표하는 문제가 중점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이 제도가 최대다수표를 얻은 당이 의회에서 1당이 되지 않을 가능성에 있었고, 몇몇 정치인들은 더 나아가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경우 잠재적으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수표를 얻은 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닌데, 2000년 미국 대선이나 1974년 영국 총선을 예로 들 수 있다. 심지어 대안투표(AV; alternative vote), 즉 선호 투표제하의 오스트렐리아조차 1998년 그런 일이 일어났다. 허나 이러한 선거의 경우 제1당과 제2당이 얻은 표차이가 작았으며, 그 다음 선거에서 결국 (다수표를 얻었으나) 패배한 당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이런 불일치가 공정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편하긴했지만, 시스템에 대한 도전 정도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다수대표제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결과에 이른 예들이 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선거제도의 편향이 너무 심각해서, 결과적으로 그 유권자들의 (제한적인) 정당성마저 침식하고 반대자들이 아예 정치장(場)에 자발적으로 불참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예가 아파르테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하의 남아프리카다. 이 경우, 선거제의 문제때문에, 다수 백인 유권자들이 재차에 걸쳐 선거를 통해 분명히 반대한 인종차별정책을 선거를 통해 승리한 당이 도입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적 관행에 의해 선거권이 백인들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음(1936년부터 1958년사이에는 제한적으로 혼혈인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국의 지지자들은 남아프리카가 고도로 민주적이며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체제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며, 자국을 “아프리카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 일컬었다. 그리고 문서상으로만 보자면, 그 헌법은 오스트렐리아나 캐나다와 놀랍게도 비슷했다.허나, 아파르테이트를 도입하게 된 선거결과, 그 과정을 보면 이 체제가 심지어 이 제한된 유권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데도 매우 무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은 1994년[1] 이전 남아프리카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였던 1948년 선거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선거에서 아파르테이트를 입안하겠다 공약했던 국민당이 여당인 연합당을 이겼다.
1948년에 이르기까지, 남아프리카 정치는 40년간에 걸쳐 영국-보어전쟁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총리였던 Louis Botha, Jan Smuts, JBM Hertzog는 모두 (패배한) 보어전쟁의 장군들이었다. Botha와 Smuts는 중도적 아프리카너(afrikaner, 네덜란드계 백인)와 영국계 유권자들의 연합을 대표하는 남아프리카당을 만들었고, 그 대척점에는 Hertzog이 이끄는 더 가난한 아프리카너와 영국계 남아프리카인들에게 호소하는 국민당이 있었다.
대공황기에, 두 당은 제휴관계를 유지했다. 이 관계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내각에서 1표 차이로 연합국에 가담하는 결정이 내려진 직후 깨졌다[2]. 국민당의 급진파는 당시 여당인 “연합 당(United Party)”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이 극단적인 분파(1948년 선거 당시 이 당은 단 한 명의 영국계 후보도 내지 않았다)가, 막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여당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허나 연합당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집권했던 다른 서구의 여당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경기침체, 그리고 국가의 미래 청사진을 결여한다는 인식 등의 약점들을 공유했다.
이에 비해, 국민당은 정부에서 영국계 우위의 구조를 끝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도시로 밀려드는 흑인들과 경쟁해야하는 아프리카너 빈민 노동자들에게 효과적인 호소를 했다. 선거결과, 연합당은 전체 득표수로는 547,437표(50.9%)를 득표함으로써 443,278표(41.2%)의 국민당을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의석수로는 국민당과 그와 연합한 당들은 79석을 얻었음에 비해, 연합당과 그 제휴 정당들은 71석을 얻는데 그쳤다.
1948 | ||||
정당 |
득표수 | % | 의석수 | % |
연합당(United Party)계 | 547,437 | 50.90% | 71 | 47.30% |
국민당(National Party)계 | 443,278 | 41.20% | 79 | 52.70% |
* 원문과 Wikipedia항목에 나온 수치가 약간 어긋난다. Wikipedia의 숫자를 참고하시라. 해당항목에 투표율로 보이는 수치도 나와있다. 80.2%.
국민당은 남아프리카 선거제도의 몇몇 유별난 점들을 이용했다. 첫번째는 선거구별 인구수가 지리적이거나 지역적 경계문제때문에 +/- 15%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였다. 선거구별 대략 7200명의 유권자들이 투표를 했는데, 국민당은 7200명 이상이 투표하는 선거구에서는 단 2석만 가져갔다. 반면 연합당은 절반 이상의 의석을 투표수가 8000표가 넘는 선거구에서 가져갔다.
둘째로, 국민당이 그 시스템에서 다수인 인종을 대표하는 당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호소한 아프리카너들은 전체 인구(유권자)의 57%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150석의 선거구 중 98개 선거구에서 다수 인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우위는 1948년 국민당 승리 후 남아프리카 정부가 UN의 독립 요구를 무시하고 병합한 나미비아에 6개 의석을 더하는 선거구제 개편으로 더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다음 두 선거는 더욱 편향된 결과를 낳았다. 1953년, 야당들은 연합전선(United Front)의 깃발 아래 모여 승리의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연합전선은 기업 및 경제 엘리트층이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 대비 선거비를 거의 4배에 가까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는 1948년의 재판이었다. 아니, 1948년보다 더 큰 규모의 불일치를 보였다. Cape Town에서 연합 전선은 73%를 득표했고, Cape Elizabeth서는 65%를 득표했다. 하지만 나머지 Cape Province에서 국민당은 57%를 득표하며 33석 중 무려 29석을 가져갔다. 이런 패턴은 전국적으로 반복됐다. 1958년에 이르자, 야당들은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결과를 보면서도 정권을 탈환할 실질적인 희망을 사실상 버렸다.
1953 | ||
정당 |
득표(%) | 의석(%) |
국민당(National Party) | 45.90% | 60.20% |
연합당(United Party)계 | 53.60% | 39.80% |
1958 | ||
정당 |
득표(%) | 의석(%) |
국민당(National Party) | 49.00% | 62.40% |
연합당(United Party)계 | 50.70% | 37.60% |
* 여기서 연합당계는, 연합당과 노동당의 의석수를 합친 것이다(중도적 연합당과 노동당은 1948년부터 줄곧 야당연합을 이뤄왔다). 역시 수치가 약간 차이가 난다. Wikipedia (1953)(1958)에 기록된 수치를 참고하시라. 투표율은 1953년 총선 87.9%, 1958년 총선 74.3% (이미 떨어지고 있다). Wikipedia의 수치에 따르면 1958년 총선은 국민당이 득표수에서도 승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전체 논지에 큰 영향은 없다.
1958년이 지나자, 투표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인들과 중도적 아프리카너들이 난공불락의 국민당에 점점 투항하기 시작하고, 좌파(liberal)들은 희망이 없는 전쟁을 하느니 이민을 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선거상 국민당의 압도적 우위는 경제제재만큼이나 아파르테이트를 약화시켰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위협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인종분포였는데, 젊은 백인들에게 정권교체의 선택항이 사라진 상황이, 많은 남아프리카의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이들을 이민의 물결로 밀어넣었다. 1970년에 이르자 영어를 쓰는 이들만 나라를 떠나는 게 아니라, 국민당이 강제하는 아프리칸스(Afrikaans;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백인 방언)만 가르치는 교육체제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젊은 아프리카너들까지 이민대열에 동참했다.
1970년말에 이르자, 백인은 연간 2만명 가량 줄어들고 있었고, 1980년대에 이르자 그 감소폭은 배가 넘어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선거제도가 국민당정부를 투표로 끌어내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체제의 반대자들은 제발로 걸어나감으로써 아파르테이트에 대한 반대를 그 발로 투표한 셈이 되었다.
[1] 아파르테이트 철폐의 해
[2] 자치를 누리고 있었던 아프리카너들은 영국과의 전쟁인 보어전쟁에서 패한 뒤 반영감정이 컸다. 그래서 (그리고 인종주의적인 경향이 강했기에) 영국과 전쟁을 벌어지는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