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만우절을 기다리는 그 주는 참 괴롭게 시작했었죠. 남편은 자기가 지도하던 대학원생이랑 사랑에 빠졌다며 날 떠난다고 했어요. 당장 내일 열대로 돌아갈거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기에 그 날도 멘붕이었지만 33년이 지난 지금도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니까…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있는데 위로랍시고 새 진공청소기 하나 안겨줬죠.
봄학기일 때니까 담날 아침에도 수업을 해야했고 수업 때려치려면 이유를 설명해야하는데 그거보다야 수업을 하는게 훨씬 쉬운 일이었죠. 그래서 6살을 3개월 남짓 남겨놨던 딸내미를 강아지와 함께 유치원에 내려놓고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아마 대충 9시 반이었을 땐데 학과장님이 날 붙잡는거에요. 내 사무실로 오라고. 아 진짜 어서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물론이죠라고 하고 학과장실에 갔더니 말씀하시더군요. 아 방금전에 알았는데 축하하네, 테뉴어 심사 통과했어요. 라고 말이죠. 물론 그 말씀하자마자 전 결국 눈물을 흘렸죠. 이 불쌍한 학과장님은 나보다 한 세대나 위의 노신사고 아들만 셋 키웠는데 자기 앞에 젊은 여조교수가 테뉴어받았단 말에 우니까 어쩔줄 모르면서 내 인생에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네 하며 앉아보게 무슨 일인가?라고 했어요. 전 테뉴어때문이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사실 어제 남편이 결별하자면서 떠났습니다라고 했죠. 그 소리 들으니까 날 보더니 자기 책상 서랍에서 잭다니엘스를 꺼내 한 잔 따라주며 그러더군요. 이거 마시면 월요일 아침 버클리교정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네. 그래서 간신히 그 날을 마치고 술 다 깬다음에 3시반쯤 언덕 넘어서 딸 데리러 유치원 갔죠.
딸이랑 강아지가 깡총 뛰어 차에 타고 집에 돌아갔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안이 엉망진창인거에요. 집에 도둑이 들었던거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내 전남편은 자주 집에서 일했는데 그래서 우리 집을 노렸던 그 도둑놈은 예상할 수 없이 집에 누가 있으니까 우리 집을 재끼다가 물론 그 날 아무도 집에 없었으니까 털렸던거죠. 그래서 911을 부르니 젊은 버클리 경찰관이 왔죠. 와서 집안을 확인하는데 물론 뭘 도둑맞었는지 몰랐는데 왜냐면 당시 남편이 일요일밤 떠나면서 많은걸 갖고 가버려서 집에 뭐가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또 그 사정을 경찰한테 설명해야했죠. 경찰관은 목록을 함 만들어보라고 하구 말이죠. 그러면서 제 딸이랑 같이 딸 방문을 열어보니 와 완전히 엉망진창인거에요. 침대는 쪼개지고 커튼 찢기고 서랍은 다 뽑히고 개판인거에요. 옆에 여섯살 바라보는 에밀리가 경관을 보면서 경찰관아저씨 제 방에 도둑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더군요 (웃음). 아 정말 감사하게도 경찰관 아저씨는 그 말에 웃지 않고 딸한테 자기 명함을 건네주면서 꼬마숙녀님 잃어버린 것 알게 되면 언제든 여길로 연락해줘요라고 했죠.
자 이제 월요일밤이 되었는데 그 주에 전 워싱턴 DC의 NIH(미 국립보건원)에 중요한 발표를 해야할 상황이었어요. 당시 어떻게 돌아갔냐면 젊은 교수가 처음으로 큰 규모의 연구비를 제안하면 꽤 자주 NIH에 돌아가서 사실상 연구제안서를 설명하는 자리였고 그 때 제겐 상당한 금액의 5년간의 연구비가 결정나는 자리였지요. 처음 신청한데다가 해본 적도 없고 너무나 중요한 미팅이었기때문에 원래 계획은 딸이 아빠랑 있으면서 담날 화요일날 친정엄마가 와서 도와주는, 계획 세울 당시만 해도 아주 좋은 계획이었죠. 물론 엄마는 시카고에 살고 계셨고 바로 지난 24시간 전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기때문에 제딴엔 버클리에 오시면 그 때 설명해드리자라고 생각했죠. 안 그러면 당장 이 밤중에 전화해서 집에 도둑 든 것과 등등을 설명해드려야하는데 말이죠. 어쨌든 그래서 화요일날 엄마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버클리로 돌아가는 차편에서 일요일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처음 말하게 된거에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시면서 엄마가 매우매우매우 화가 나셨어요. 아니 어떻게 이 가족이 이렇게 파탄나게 된거냐?!!라면서 아니 어찌 손녀를 아빠 없이 크게 놔둘 수 있겠냐, 아니 이 판국에 딸내미를 놔두고 워싱턴 DC로 날라가겠다고, 가정을 팽개치잔 얘기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정말 내 딸 뭐하는거냐, 지금 네 딸이 차 안에 앉아있는데 어딜 가겠다고, 나 사위한테 연락해야겠어, 엄마 그이는 코스타리카로 돌아갔어요, 연락 못해요, 연락해도 못 와요, 이런 소리하면서 점점더 감정이 고양되시더니 버클리 집에 도착했을 땐 너무너무 화가 나 계셔서 딸을 엄마한테 맡겨놓고 떠난다는 건 불가능한게 분명해보이더라구요. 급기야 몇 시간 뒤엔 난 도저히 지금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가 없고 난 집에 돌아가겠다, 네가 애를 봐야지 가긴 어딜 가냐, 아니 서부에서 동부 갈 생각 꿈도 꾸지 말아라, 그러면서 난리를 치신거에요.
33년 지난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불과 일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 사건 이후 두 달 이후에 엄마가 간질진단 받으신걸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데, 물론 그 당시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그래서 전 네, 엄마 말이 맞아요. 엄만 집에 가세요. 내일 돌아가시는 비행기표 바꿔놓을게요. 내일 공항에 데려다드리고 전 미팅 취소할게요라고 말이죠.
그러고나서 몇 년 전까지 UCSF의 내 포닥 지도교수한테 연락했죠. 이미 그 분은 워싱턴DC에 있었는데, 우연히 종양학회가 당시 DC에서 열리고 있어서 말이죠 — 저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무슨 일 일어났는지 간단히 알려드릴게요 하면서요. 물론 그 분은 절 잘 아시기때문에 제가 겪은걸 다 잠자코 들으시더니, 다 큰 딸 키워낸 분이죠, 그냥 오라는거에요. 못 간다니까요라고 하니까 딸 데리고 와요, 그간 에밀리도 잘 봤으니까 자네가 발표할 때 딸 봐줄게라고 하면서 말이죠. 손자 손녀도 있어서 애 볼 줄 알아 이러면서요. 애는 비행기표가 없어요 했더니 내가 이 전화 끊자마자 항공사에 전화해서 딸이 엄마랑 같이 같은 비행기편으로 갈 수 있게 알아볼게, 다 괜찮을거야라는거에요. 진짜요? 진짜라니까 괜찮아 하시면서, 야 나 지금 빨리 끊고 항공사에 연락해야하니까 잘 자 이러시더군요. 네, 그 땐 비행기표 바꾸는게 훨씬 쉬운 시절이었죠.
그래서 전 전화 끊고 엄마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바꾸고,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비행기는 아침 10시 출발하는 비행기였을거에요. 그래서 뭐 아침에 버클리를 출발해서 일반적이라면 충분한 시간 안에 도착해야하는데 베이브릿지가 완전 막혀서 45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45분에서야 도착한거에요. 그래서 엄마 비행기는 15분에 떠날 예정이고 저랑 딸의 비행기는 45분에 떠날 상황인데 항공권 받을 줄은 길기만하고 — 딸 항공권을 찾았어야하니까요 — 게다가 저와 딸 가방에 엄마 가방들까지, 거기에 엄마는 이미 노쇠하셨을 때니까요. 에밀리랑 저랑 엄마가 줄에 서 있으면서 제가 엄마한테 혹시 직접 비행기 타러 가실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기억하셔야할게 그 당시엔 지금처럼 무슨 보안검색대가 있고 그런 시절이 아니지만 공항간 게이트들은 여전히 머니까 말이죠, 일언지하에 아니, 나 혼자 못 가 이러시는거죠. 그래서 전 딸한테 에밀리, 엄마가 할머니 모시고 저기 갔다 올테니까 여기 잘 기다려라고 하니까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지르시는거죠, 아니 어떻게 애를 여기 혼자 둘 생각이냐고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거에요. 에밀리는 제가 봐줄게요 어서 가보시죠라고 말이죠.
전 뒤돌아보고 아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엄마는 저를 노려보면서 얘야 넌 네 딸을 아무 사람한테나 맡기고 갈 수 있는게 아니란다!라고 말씀하셨죠. 엄마, 제가 Joe DiMaggio를 믿을 수 없으면 대체 누굴 믿을 수 있단거에요?라고 답했죠. Joe는 저를 한 번 보고 엄마를 보고 에밀리에게 함박웃음 지으면서 손을 내밀고 에밀리, 나 Joe야, 그러면서 악수를 하고 딸은 안녕 Joe, 난 에밀리야라고 하는 와중에 전 엄마, 빨리 가요하고 공항을 가로질러 엄마 수속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한 20분인가 25분 지났을 때죠.
그 때 에밀리랑 조는 카운터 완전 앞에까지 가서 수다 떨고 있었어요. 조는 이미 에밀리에게 항공권을 손에 쥐어주고 분명히 제가 올 때까지 비행기 타는걸 미루고 기다리고 있었던거에요. 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하고, 천만의 말씀 소리하고 자기 게이트쪽으로 걸어가면서 크게 경례와 손을 흔들어주면서 씩 웃으며 자기 비행기를 탔고 저 또한 간신히 워싱턴 DC행 비행기 타서 인터뷰를 무사히 치루고 연구비 승인 났고 그 연구비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이제 33년 지난 지금 유방암 유발인자 BRCA1 유전자( https://en.wikipedia.org/wiki/BRCA1 ) 연구의 시초가 되었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날림)번역해본 것: https://www.youtube.com/watch?v=tOP5pUIYhv4
이 과학자의 업적은:
https://en.wikipedia.org/wiki/Mary-Claire_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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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를 읽고 사람들이 다양한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인상 깊었음. 누군 여성과학자의 경험고백에 위로를 받았고들 하고, 또 혹자는 야구선수이름에, 또 혹자는 좌절스러운 순간에 그를 도운 학과장, 경찰관, 야구선수, 지도교수에, 또 혹자는 그 술 이름에, 또 혹자는 그 술을 서랍에서 꺼내는 상황에, 또 혹자는 가족들의 무용함에. 각자 읽을꺼리들이 있을 듯.
ps https://www.nytimes.com/2017/04/03/books/review-the-moth-presents-all-these-wonders.html 좋은 책이라고 함. 아마 번역본이 나오겠죠 (이미 나왔는지도 — 참고로 2015년 나온 책과는 다른 책임. 이게 TED처럼 시리즈물이라고 함).
잘 읽었습니다. youtube보다 번역을 더 재미있게 해놓으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