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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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phia 2007/02/18 0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글도 소개해주어 고마워. again, enjoyed it.
    집에 뒹굴고 있던 '자건거 여행'도 바로 집어들었어. ^^

    • nobody 2007/02/21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링크만 걸었는걸 뭐. 너도 책 다 읽으면 서평 부탁할게 :)

0.

I finished at last! I hope you followed my advice and did not play all the spools in one day.

p.291


앓았다. 아직도 꽤나 앓고 있지만, 이게 앓고 있던 것의 여진때문인지 (하루 동안 밥을 안 먹었다) 아니면 앓음의 연장인진 모르겠다. 일어나서 어제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과 조우했을 때, "아프면 서럽지 않습니까"라는 반문은 하지만 맞지 않았다. 마음으로 앓았던 것이든, 몸으로 앓았던 것이든, 서럽진 않았다. 다만 버거웠을 뿐이다. 그 손가락도 움직이 버거운 시간에, 허나 그냥 누워있기에는 허리가 아픈 순간이 왔고, 허리도 아프고 천장의 별자리를 보기도 질릴 때 이 책을 펼쳐들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최근 김규항씨의 블로그 포스팅때문이었다. 여기 와서 괜히 욕심부리며 하는 일 중 하나가 없는 시간에 도서관에 책 주문하는건데 (의대캠퍼스가 주 캠퍼스에 떨어져있지만,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의대도서관으로 책을 배달해줄 뿐만 아니라 기간연장도 2번이나 가능해서 3개월동안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번에도 주문해봤다. 아직 빌린 두 권의 책, "The Measure of Reality"와 "Rethinking Feminist Ethics"는 아직도 다 못 읽었는데도 노예의 길도 아직 남았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역사"라니. 성의없이 쓴 역사서와 SF소설들에 질린 게 한참 전인데, 감히 (모순어법이라고 하지만) 미래에 대한 역사라. 하지만 순전히 돈도 안 드는데 "통찰과 서정이 가득찬 책"이라는 김규항씨의 말에 잡게 된 셈이다. 덕분에 여기 도서관에서 완독한 첫번째 책이 되었다. (물론 가짜 연표는 안 읽었다)

책은 Book the first : Earth, Inc., Book the second : Red Earth, Book the third : The house of earth의 3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마지막 발문(Afterword)에서 Immanuel Wallerstein이 쓴대로, 이 책의 3부분은 바로 현재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3가지 희(절)망들(디스토피아와 2 유토피아)을 펼쳐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디스토피아는 역설적이게도 흥미롭고 편안하게 읽어내려갔지만, 파국과 뒤이은 두 개의 유토피아는 좀 읽기가 괴로웠다. 재미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희망과 유토피아를 그리기에는, 그 전제들이 너무 성긴게 아닌가 하는 자본주의 사회 우울한 제3세계(또는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반주변부(semiperiphery), 나중에 "핵심(core)"의 일원이 되는 한국)의 유학생의 비관이 너무 짙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 자체로 놓고만 보자면, 잘 썼고, 중간중간의 "Interlude"는 "거대한" 역사를 그릴 때 사람들이 대개 놓치는 미시사를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여러 서평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1. Book the first : Earth, Inc.

그냥 디스토피아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한 번쯤 읽어보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권해주고 싶다. 물론 대한민국이나 세계나 현대에 직면한 문제들이 복잡하고, 그 처방들은 더없이 부족하며, W. Warren Wagar가 90년대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가상세계의 팽창이 미래의 종속변수일지 아닐지, 기술발전이 초거대기업들(megacorp)의 운명을 20세기 30년간의 중간기 때 독일의 거대기업군들(IG Farben 과 같은)과 다른 운명을 선사해줄지 모두 각각 의미있는 비판의 여지를 지니고 있겠지만, 지금 최소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리고 또 세계적인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몇 가지 흐름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음미할만하다.

발췌



"마지막" 핵전쟁의 시작은 너무 엉성하고 좀 급한 면이 있어서 재미를 반감시켰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내재적인 모순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경고를 무시할 없는 것은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과 같은 이론적인 결론때문이 아니라 세계사 자체가 가끔은, 또는 자주, 우연에 의해서 크게 흔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의 필연성을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임박한 재난, 파국"만큼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은 인류가 인류를 몇 번 파멸시키고도 남을 기술을 너머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분명한 경향 자체때문이었다. 내가 (아주 부분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19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전세계적인 군비확장경쟁에 대해 사람들이 거의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핵"이라는 단어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그런 면에서 제 5 장의 내용과, 그 마지막 구절은 특히 인상적이다.

I do not think he was an evil man, in the sense of deviantly malicious or misanthropic. He was, in fact, a typical man of his time, a good soldier and a loyal American; a simple man; and, through no special fault of his own, a fool.

p.125


2. Book the second : Red Earth

Perhaps what we call "the service of being" imply the service of a homogenized, dominant, majoritarian world culture that will turn into the greatest tyranny the human race has ever known. When you're in the majority, you don't even think you have a special culture of your own, you think you represent "universal values." You want to crush everything that isn't "universal," that could ever be a threat to your power.

...We don't consult the people we're supposed to represent. We lecture them. We say, we're going to do this, and we're going to do that, and we do it, and that's the end of story.


p.153-154


두 번째 부분에서 이어지는 파국 이후의 사회는 (약간 어이없는 목소리로)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것도 철지난 것으로 보이는. 저자의 목소리는 기술의 발전이 "충분할 때" 이런 역사가 가능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노예의 길]을 읽고 있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정말 계획된 어떤 사회가 출현할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가는 묘사된 것보다는 틀림없이 클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의 (가상) 저자가 이 시대의 적자이기 때문에 좀더 긍정적인 어조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3. Book the third : The house of earth

마지막 파트는 좀더 환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의도인것 같은데, 여기 마지막 interlude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담에서 이 세계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는 인물은 "평양에서 온 윤석미"이다.

Yoon : ... How can a civilization that admits so many possibilities displease us? I have just reminded you that it cannot be a utopia, in its own time. By one idea of the good, it passes muster; by another, it may not. So it has been with all societies, all the works of men and women. When you understand, deeply and fully, the futility of judgment, you will cease to fret about progress and utopia and destiny, and you will rejoice in the sublime now, the twinkling of eternity reserved for you!

p.273


사실 2150년 이후의 역사에서 저자가 개진하는 Homo sapiens는 이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허황되긴 했지만, 결국 인류의 모든 어려움은 인류 자신을 개조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말에 그냥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에바 시대 얘기도 아니고...쯧쯧

4.

그냥 오랜만에 "상상의 세계사"를 읽고나니, 누군가의 글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좀 뒤져보니 나온 단락. (서평인데 이걸 트랙백해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혹시나 M님께서 설마 방문하시고 적절한 인용의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즉시 수행하겠습니다)

http://marlais.egloos.com/1446141

항상 구체적인 미시 생활 공간에 위치해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거시 공간을 건설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공간은 거대한 체제로만 상상하게 된다. 미시적 실제 경험이 없으니까, 거시 공간 밖에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책에도 뭔가 편견, 스테레오타입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저자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지니지 않은 (하지만 꽤나 많이 Americanization의 세례를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한) 학생이 보기에도 그의 다른 문화, 문명에 대한 이해는 꽤 무력하게 보였다. 그런 무지야말로, 야심차게 그만의 유토피아를 그릴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 이유이기도 하겠다. (미래에 출현할 기술에 대한 그의 기대는 뭐라 지금 비판하기 어렵다. 물론 수명연장과 영원함, 그리고 유전자 조작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공부하고 나중에는 비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가들의 비판이야말로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아니던가. 조금 이상한 감정이긴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에 - 이 포스트를 시작한 첫 구절의 경고대로 하루는 아니지만 이틀만에 그냥 읽은 셈이니 저자의 의도대로 잘 소화한건 아니다 - 좀더 공부할 마음이 생겼다.

p.s. : 아직 좀 현기증이 나지만, 괜찮습니다. 뒤쳐진 공부하느라 정신없겠군요.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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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yuhang.net/archives/2004/12/22@01:16PM.html

고등학교 시절, 때마침, 라디오 프로에서 들려주는 사연 중에, "열 손가락 지문을 찍으며 전 드디어 성인이 된 것을 느꼈습니다"를 들으며 고개 끄덕이고 동사무소에 내 손가락에 인주를 묻히러 향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을 만나 지문날인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듣고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지문 전산화 반대(신식 주민증발급 반대) 때문에 한동안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새파란 새내기였던 나는 김규항씨와 달리 운전면허증도, 트랙백한 다른 사람과 달리 여권도 있지 아니하였다.

내 보폭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신식 주민등록증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렇다, 게으름에 대한 변명. 아직 구식 주민증의 시한이 다하기 전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 노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지금 돌아보면, 그러기 싫었다. 게을렀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또 전자주민증이 통과하지 못했듯 지문의 전산상의 통합 또한 불발에 그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국가 기관의 "인증"을 받지 않은 "국민"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내 은행계좌에서 인출도 못하고 (입출금거래가 많다보면 통장 정리를 해야할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각종 공인시험 등록도 못하고, 뒤늦게 부랴부랴 운전면허 신청을 했지만, 그 신청 자체가 안 되는 걸. 결정적으로 혼자 살고 있던 마당에 외국에 계신 부모님의 급한 소식에도 여권을 만들지 못했다.

사실 그런 불편함은 감수할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그리고 아무런 지평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들의 버무림이었다.

"도대체 문제의식이 잘못되었다고 봐, 문제는 내가 스스로 가는데도 나를 증명할 수 없는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니?"라는 말씀을 하는 씨니컬 선배나,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만 당신을 증명할 순 없습니다"를 말하는 동사무소 누나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걱정이 지나친 게 아닙니까?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라고 말하는 행정자치부 공무원아저씨보다 좀 더 맘이 상했던 것은, "난 운전면허증이 있어서 잘 버티고 있는데"밖에 해주실 말씀이 없는, 지문날인 제도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던 선배였다. (물론 그 분때문에 맘 상할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 때는, "피켓 들고 서서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언제까지 끝없이 이어질지 모르는 (헌법재판소는 영겁의 세월마냥 굼떴다. 그런 면에서 헌법상의 행정수도는 정말로 중요한 국가대사였다고 볼 수 있다) 길 뿐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난 "조직의 적(籍)에서 이 아무개를 증명하지 않겠노라"라는 단순한 '거부'로 "조직의 쓴맛"을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이제 동사무소에서 인감증명을 할 때 지문날인을 요구하는거나, 선거날 인감도장을 갖고 오지 않고 지문으로 날인하는 이들을 보면 그저 씁쓸하게 마음 한 구석 새겨진 좌절과 "나는 배신자"라는 기억들을 돌아볼 뿐이다. (아니다, 어쩌면 맘 속으로, 인감도장의 문양까지 초정밀 스캔을 떠서 주민번호만 치면 화면에 뜨는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동사무소 아저씨를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바른 것"을 이야기하는데도 훈련이 필요한 것일까? 즐거운 승리의 순간들이 필요한 것일까? 아직도 숫제 많은 이야기들이 마음 속에 유보된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 물음표들이 내 소시민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비겁함을 받쳐준다.

그리고 - 그런 유보된 물음표 왈왈 모두 변명들인걸. 언젠가는 "함께 바름을 나누고 힘쓰는 행위"에도 편해질 수 있겠지.

from

개인

읍사무소에 뭘 떼러 가서 운전면허증을 내밀면 거기 앉은 이가 꼭 한마디씩 한다. 내가 아직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는 걸 두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투는 상냥하지만 내용은 은근한 훈계다. 그러면 그저 좀 더 노골적인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 것이나 다행으로 여기며 잠자코 있다. 읍사무소의 말단 공무원과 지문날인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게 하찮은 일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사람’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게 한국인의 특징이라고도 하지만 글쎄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피를 타고난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파시즘 치하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파시즘이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개인은 우리가 흔히 파시즘의 요소들이라 여기는 감시, 폭력, 고문, 계엄령 따위의 억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수면 아래로 숨을 뿐이다. 개인을 없애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개인끼리 서로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다른 개인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도록 길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파시즘의 집행자들의 숙제이며 그것만 되면 사천만이 아니라 사십억도 줄에 달린 인형처럼 쉽게 조종할 수 있다. 끔찍한 건 그렇게 길들여진 습성이 파시즘의 집행자들이 물러간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아 작동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촛불행진을 벌이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지문날인이라는 능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공동체적 이상을 좇는다. 사회주의적인, 혹은 생태적인, 혹은 또 다른 고귀한 지향을 가진. 공동체적 이상은 인간이 갖는 가장 인간적인 전망이며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결국 공동체적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이상을 좇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있다. 진정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인이 되지 않고는 우리에게 공동체는 없다. 이런저런 집단만이 있을 뿐.


Posted by gyuhang at 01:16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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