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happened that I had a database crash - and after having a painful tape recovery, all Korean fonts were changed. I can fix it, but I decided to make a fresh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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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put it bluntly, they want democracy only if it is largely powerless - or as Ken Livingstone, the current left-wing mayor of London said in a 1987 book title, If Voting Changed Anything They'd Abolish It.

Thus seen, like the old liberals, neo-liberals believe deep down that giving political power to those who 'do not have a stake' in the existing economic system will inevitably result in an 'irrational' modification of the status quo in terms of distribution of property (and other economic) rights. However, unlike their intellectual predecessors, neo-liberals live in an era when they cannot openly oppose democracy, so they try to do it by discrediting politics in general. By discrediting politics in general, they gain legitimacy for their actions that take away decision powers from the democratically elected representatives. In doing so, neo-liberals have succeeded in diminishing the scope of democratic control without ever openly criticizing democracy itself.

Ha-Joon Chang Bad Samaritans, p.176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은 여러가지로 꺼려지는 것들이 있어서 읽기를 주저했는데, 최근에 다 읽을 수 있었다(외국에 있다보니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건 영문본. 죄송). 학술서라기보단 뭐라할까, 정치팜플렛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저자도 그걸 목표로 한듯), 과연 이게 번역되어 한국에서 읽히는게 실제로 한국의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안 될까 읽는 내내 헷갈렸다(한국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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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떤 블로거A"의 일상에서 드러난 행태에 대해서 어떤 다른 블로거B의 반론이 오래 울린다. 이 A라는 분은 한국땅에서 보자면, (하는 말로 치자면) 빨갱이 좌파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분이고 실지로 자칭 '급진적'이라는 말을 제 이름에 붙이는 분이다. 감정싸움이야 그냥 잊어버리지만, 이 B라는 분의 논지는 이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좌파라고 자칭하는 자가, 어찌 남의 것을 제 값 내지 않고 쓰는 걸 불편히 여기지 않는가? 좌파라면 응당 노동의 가치에 대해 더욱 민감해야하는거 아닌가?"

아마 "ë¶„ë°°"에 민감한 "전통" 좌파들에게는,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ì°©ì·¨'당하고 있다는 얘기가 대전제야할텐데, 좌파를 자처하는 이가 남의 노동의 가치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말이었을 것이다. 나야 스스로를 좌파 근처에도 일컬을만한 깜냥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지만, 이게 ê¼­ 좌파에게만 해당되는 말인지는 머리가 ì§§ì•„ 모르겠다 - 어쩌면 제대로 된 우파는 '노동의 가치'라는 ê±´ 환상이라고 판단하는 것인지도. 수요/공급.  

어쨌든 그 이후로 "값"이라는 게 붙은 물건에 대해 내가 "제 값"을 낼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그 물건(physical하든 아니든)을 만들 때까지 들어간 '노동의 가치'를 매일매일 좀더 의식적으로 묻게 된다.

'표절'에 대해서 흥분하는 것과 기사나 글을 전재하는 것, 옆에서 '어둠의 경로'를 걷는 이 옆에서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과 얻은 논문 신나게 읽는 것, 학계 출판권력에 대해서 성토하고, 또 제 업의 "제대로 된 몫"에 열변하면서, 또는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누리겠다고 도전하는 이들이 깎인 값을 찾아 산과 바다를 건너는 걸 볼 때 느끼는 감정들. 등등.

"돌들 자격이 있다"라는 말이 아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고, 어떻게 강자들이 실제 "제 몫"을 빼앗아 분배가 뒤틀리는지도 들어왔고. 하지만 그런 변호, 변명 또는 합리화 사이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건 그런 합리화가 양날의 칼이기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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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천 칼럼의 원제목은 "박근혜의 항명"이다. 하지만, 미디어법과 관련된 박근혜의원의 행동, 그리고 예상은 (교수의 주장대로) 큰 변수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7항에서 그가 말한 인권위원장의 자기표절에 대한 부분이야말로 눈에 번쩍 뜨인다.

(이 게시판에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께는 링크를 따라 읽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 ··· ion%3D01

7. <한겨레>는 이렇게 썼다. "국회도서관에 올라 있는 현 위원장 논문 21편 내용을 살펴본 결과, 1998년 학술지 <비교사법> 제9호(한국비교사법학회 발행)에 실린 '무효'라는 제목의 논문과 2002년 <법학논총>(한양대 법학연구회 발행)에 게재한 '무효에 있어서의 대항력의 문제'라는 논문은 제목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의 논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논문의 서론을 비교해 보면, 2002년 발표한 논문은 1998년 논문의 서론에서 첫 문단을 제외하고 이어지는 네 문단, 에이포(A4) 용지 1쪽 반 분량을 그대로 옮겼고 마지막 문단에 여섯 문장을 덧붙였을 뿐이며 11쪽 분량의 본론은 12개 문장을 새로 썼을 뿐, 나머지 부분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면서 "각주의 위치와 내용까지 동일해 사실상 같은 논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출처나 인용 표시는 없었다"고 했다.

7.1 이 보도가 맞는다면,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기표절이다. 논문에서 인용한 전거를 밝히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공로로 발견된 지식을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가로채면 안 된다. 자기가 쓴 글이라도 다른 곳에 이미 발표된 글이라면 그 점을 밝혀야 이번에 발표하는 글이 마치 새로운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상호확인을 통한 지식의 진보와 공유를 위해서 원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을 스스로 파고들어 확인할 수 있도록 편의를 최대한 제공하기 위함이다.

7.2 현병철 교수의 경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조차 대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거론하는데, 이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소치다. 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을 부분적으로 몇 문장만 손을 봐서 다른 곳에 발표하더라도 출전만 표시하면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전에 발표한 내용을 다시 (물론 출전을 밝히고) 사용할 수 있으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는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a 두번째 저작을 통해서 새로이 기여하는 내용을 위한 바탕으로서 종전에 발표한 내용이 다시 개진될 필요가 있을 때.
b 새로운 증거나 논증을 논의하기 위해서 종전에 출판한 내용이 다시 제시되어야 할 때.
c 두 출판물이 겨냥하는 독자층이 워낙 달라서 공표하려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는 재출판이 불가피할 때.
d 저자가 느끼기에 전에 발표한 내용이나 방식이 아주 좋아서 다르게 말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을 때.

7.3 현병철 교수의 논문들은 중복의 정도로 볼 때, a와 b에는 해당할 수가 없고 c나 d만이 정당화 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비교사법』의 독자층이 한양대 『법학논총』의 독자층과 "워낙" 다르다고 보기는 어려울 테니까, 결국 내용이나 발표방식이 완벽해서 다르게 말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항만이 남는다. 내가 보기에 저 논문은 "완벽"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데, 혹시 그렇게 볼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현병철 교수 본인은 완벽해서 고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지 않고, "각 논문의 논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전 논문에서 필요한 부분을 갖다 쓸 수 있"고 "새 논문에 이전 논문을 원용했다는 점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7.4 전체 길이 14쪽 분량의 논문에서 문장 21개를 새로 써서 논지가 달라질 수는 없다. 따라서 "논지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갖다 썼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새 논문에는 이전 논문을 원용했다는 표시가 없다. 그러므로 "표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도 사실일 수가 없다. 나아가 이와 같은 경우는 설사 출전표시를 했더라도 자기표절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똑같은 논문을 서로 다른 두 개의 학술지에 실은 행위를 지식의 공유, 심화, 발전, 전파를 위해 정당화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순전히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7.5 현병철 교수는 인권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인권위원장으로 마땅치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나는 그가 과연 일반적으로 법학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법률지식이나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같은 논문을 두 개의 학술지에 싣고, 더구나 그 일에 관해 대답하는 태도에서 그는 표절이 뭔지, 자기표절은 뭔지, 업적을 참칭하는 행위는 뭔지 등에 관해 기초적인 이해도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금세 사실이 아니라고 드러날 주장을 펼쳤다.

7.7 이 분을 기어이 중용해야겠다면 차라리 검찰총장을 맡길지언정 인권위원장에는 완벽한 부적격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정상상태라면 검찰총장도 맡아서는 안 되겠지만, 이 정권 아래서 검찰은 정상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하물며 인권위원장은 전혀 비슷하지도 못하다. 인권이란 세세한 사정에 관한 치밀한 분석력이 없이는 감지할 수가 없는 주제다. 표절이 뭔지, 자기표절이 뭔지도 분간을 못 하는 사람이 공권력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미세한 균형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 없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
마지막에 방동천 교수는 이렇게 맺는다.

이것이 자기표절의 사례로서 명백한 사회적 판정을 받는다면, 우리 사회의 정직한 미래를 향해 커다란 주춧돌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게 자기표절의 사례로 명백한 사회적 판정을 받는대신 그대로 묻혀버린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얼마나 무너질지(또는 무너져있는지?) 또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질 것 같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옛날에는 모호한 두려움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큰 용기를 내어 뭔가 아주 작은 지식이라도 "기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매일 실감하는데, 정말 이런 것도 "관행"으로 넘어가면, 대한민국 지식인, 교수"사회"에 대해서 물을 수 밖에 없다. 마치, "일부 교회때문에 내가 속한 교회도..."라는 말로 종교"계"의 수준이 면피될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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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또는 영화에서 나온대로 '초자연' 즉 'supernatural')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을 두고 양편으로 두 입장이 자리해서 일종의 '균형'을 이룬다. 이 영화가 전복적인 것은, 한 입장이 그 경계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 자리잡고 연극을 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입장들 사이의 균형을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는다. 그 효과를 위해서 영화, 가짜를 진짜처럼 연기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최적이고,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좀더 생각해보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경계를 기준으로 한 쪽편에 다른 입장에 서서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을수록, 역설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그게 임종의 순간에 Jerome이 이 script를 부르면서 의도한 것이었을지도)


짧은 시간에 밀어넣으려다보니, 인물들은 전형적인 "상식선"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특히 이른바 생물학자의 태도는 생물학자로서 실제와 떨어진, 일반인들이 갖는 이미지에 기댄 것이 보여 거북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결말이 너무 세서, 전체적으로 '다듬어져서 세련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작위적인' 느낌을 줘버렸다.

이 영화는 오래 전에 실험실 인도인 대학원생의 남편으로부터 추천받은 것이었는데, 보고나니 살짝 웃음이 난다. 뭐라할까, 괜히 전형을 또 한 번 목격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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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을 이제서야 봤다. Golden tree대신에 golden bough로 봐야한다는 말이다. Google의 바다에 찾아보니 딱 한 개의 레퍼런스가 있다. (하지만 그 레퍼런스에서도 "Lebens"를 "살아있는"으로 번역하진 않았다) 참고로 Golden bough 자체는 유명한 인류학자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파우스트를 더 읽어내려가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학생의 책에 써준다.

ERITIS SICUT DEUS, SCIENTES BONUM ET MALUM.
창세기 3:5의 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나온 말.

참고로 에덴의 동산에는 두 개의 나무가 있었다. 선악과를 맺은 나무와, 생명의 열매를 맺은 나무. 그 대비를 생각해보면, Goethe의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을 법하다.

나도 비전문가이니, 나중에 독문과분께 여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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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자신의 이름은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름을 본 타인들은 그 이름이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욕망이든 두려움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대개 그 과정 중에 이름 위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이들의 그림자가 포개지기 마련이다. 점점 짙어지는 그림자에 지키고자 했던 이름은 잘 보이지 않기 십상이다. 묻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잊지 않으려 되뇌이고, 또 쫓아내고자 외쳐볼 수 있겠다.

불현듯 그저 주문처럼 자신의 이름을 외워서는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또한 그런 착각이 다시 스며들지 않도록 단단히 할 때, 그제야 그 그림자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와지는 게 아닐까.




- 김규항씨의 블로그를 들어갔다가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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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약하고, 취약하다는 걸 잘 안다.
그걸 잘 안다고, 유약함과 취약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역설과 역설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냉소가 덮친다.
잠시 핸들을 놓친 것 같이 수많은 감정이 떠오른다.



절망하지 않는다.
오직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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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reat fear has been at work in my mind and God has used it to arouse me to prayer. I came across a man whom I knew years ago, a mighty man of God, and now ten years have gone and I meet him again – garrulous and unenlivened. How many men seem to become like that after forty years of age! The fear of sloth and indulgence has come home with a huge fear and fairly driven me to God to keep me from ever forgetting what I owe him."

Oswald Chambers, Leagues of Light: Diary of Oswald Chambers 1915-1917, p.42

내 마음 속에는 하나의 큰 두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셨다. 수년 전 나는 한 남자, 곧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을 알았었다. 이제 10년이 흘러 다시 그를 만났는데 수다스럽고 기운빠지게 하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40세가 넘으면 그렇게 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게으름과 방종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무섭게 엄습하여 나를 하나님께 끌고 가서 내가 그분께 빚진 것을 다시는 잊지 않게 했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p. 179-180에서 재인용

이 구절을 인용한 책의 다음에는 Oswald Chambers의 다음 일기도 인용하고 있다:

"나는 10년 전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 온화해지지도 않고 더 활기 있게 변한 것도 아니고 노련해지지도 않은 채 그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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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것이 어려운 시기다.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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